선과 점을 통해 화면가득 채워진 박유진의 유기적 드로잉은 반복을 통한 확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기본 형태는 원과 점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먼저 그은 둥근 원 속에 찍혀지는 작은 점들은 닫혀 진 세계가 아니라, 그 어떤 열린 세계를 지향한다. 그것은 종이 위를 무한대로 증식하는 원과 원, 점과 점으로 반복되면서 더 이상 점이라기보다는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무한히 확장되는 유기적 회화로서의 점이 된다. 이 원 혹은 원 속에 찍혀지는 점들은 유기적 입체로서의 점을 만나 시․공간의 점이 선을 낳고 선이 면을 낳아 평면에서 입체가 되듯이 작가는 점차 점과 점의 공간이 주는 미묘한 간격 속에서 반복된 행위를 통해 확장된 세계, 한 방울의 물이 거대한 폭포가 되고, 하나의 물방울이 바위를 뚫어내는 힘처럼, 공간과 시간을 뚫어내는 반복이라는 행위 과정을 통해 무한히 증식되는 생성하는 힘을 길러내고 있다.
이제, 하나의 화면에 가득 찬 점들은 수만 가지의 생각을 담고 하얀 종이 위에 증식하면서 색과 형으로 얽힌 이미지에 대한 억압의 고리를 잘라 억압을 푸는 열쇠가 되어 무한히 확장된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 놓는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구체적인 형태도 명확한 색채도 서로가 서로를 반영하면서 다만, 눈부신 점들의 집합이 색을 인지하는 망막의 틈새에서 유기적 확장을 이룬다. 망막작용이 점을 점으로 선을 선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시각적 효과인 망막의 틈새는 마치, 기표와 기의의 미끄러짐 속에서 발생하는 언어의 차원에서처럼, 실재의 부재를 통해 구체적인 것으로 규정되지 않고 역동적인 생성의 과정으로 반복 혹은 확장된다.
점 혹은 선으로 이루어진 박유진의 <잘 알지도 못하면서>연작은 이렇듯, 구체적인 형태를 갖지 않는 확장되어야 할 그 무엇의 의미를 무한증식의 유기적 힘으로 재생산하고 있다. 그 힘의 생산은 어디를 가서나 이동하는 동안에도 선을 긋고 점을 찍는 행위의 반복을 통해 마치 세포가 분열 증식하는 것처럼, 점과 점 그리고 선과 선은 서로 서로를 반영하면서 새로운 형과 색으로 분화하는 생성의 힘이다.
조각을 전공한 작가의 감성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무엇을 어떻게 그려가야 할지, 박유진은 불특정 다수를 향해 여러 가지의 질문을 한다. “계속하다보면 진짜 무언가 될까요? 많은 것은 무엇이고 적은 것은 무엇일까요? 기준이 있을까요? 왜 난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 거죠? 할 수 없는 것을 하고 싶은 건 나만 그런 것은 아니겠죠? 미술이랑 디자인이 뭐가 다른 거죠? 큰 게 좋은 건가요? 작은 게 좋을 수는 없나요? 색은 뭐죠? 크기는 뭐구요? 많고 적은 것은 뭐고, 나쁜 것과 좋은 것은 뭔가요? 완성이라는 것은 있는 것일까요? 살아있다는 것은 어떻게 느끼는 거죠? 세상의 구분을 내가 맞춰야 하나요? 그리고 도대체 미술이 뭔가요? 난 꼭 청개구리 같아요. 힘들어요. 나 혼자만 외치는 것 같아서 너무너무 힘들어요. 내가 청개구리라서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아요. 대답해 줘요. 내가 지금 이렇게 묻고 있는 게 맞는 건지.”(아트인컬츠, 2009년2월호,p.128, ‘동방의 요괴들’ 박유진의 글 중 일부)
여기서 제시한 여러 가지 질문에 스스로 답을 찾기 위해 박유진은 그림을 그린다. <유기적 드로잉>은 조각을 전공하면서 가졌던 신체 드로잉의 선적 구조, 인체에 대한 몸과 뼈에 대한 선적 구성을 모델 없이 해 나가면서 의식과 무의식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유기적 드로잉은 모델이 없는 곳에서 보다 자유로운 선적 구성이 이루어지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면서 인체에서 출발한 선이 점차 인체를 벗어나 분화된 형태로 나아가면서 자유로운 형태가 되는 것에 대한 발견이다. 이것은 어떤 구체적인 형태(인체)를 갖지 않고, 추상화되면서 제3의 형태가 만들어 지는 과정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되는 과정이다. 이 발견의 경험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의식과 무의식이 교차되는 지점으로 회화적 언어가 어떻게 드러나는 지를 경험하는 순간일 것이다. 이는 자신의 손이 만들어 내는 결과물을 확인하는 순간이자, 점과 선을 통해 화면을 채울 수 있다는 확신, 그 확신이 그림이 되고 회화가 된다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일 것이다. 미술에 대해 잘 모르기에 붙여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연작은 바로 그 모르는 것을 알고자 시작한 작업들이다.
이렇게 박유진은 보이는 것(그래서 안다고 생각하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그래서 모르고 그렇기에 두려움 혹은 억압으로 작용하는 것)을 연결하는 상징적 의미인 반복을 통한 확장의 세계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연작으로 하나의 연결고리 즉 통로를 만들어 간다. 박유진은 반복된 원, 그리고 그 속을 채우는 점으로 화면을 가득 채우면서 일상(보고 느끼는)에서 일탈되고 변용된 새로운 세계를 점으로 그린다. 박유진이 만들어 가는 그 새로운 세계란, 아무 것도 없는 보이지 않는 하얀, 텅 빈 공간을 원과 여러 가지 색의 점들로 채워가면서 보이는 색, 꽉 찬 공간으로 바꾸어 놓는다.
도대체 미술이 뭔가요? 라고 물으면서 박유진은 그 질문의 답을 작은 원, 작은 점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 원과 점으로 함축된 반복된 힘은 ‘모른다’는 틀을 깨고 확장된 세계를 향해 무한한 창공을 향한다. 이 무한히 열린 창을 열어가는 열쇠가 하나의 점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것이 박유진의 작업을 주목하게 되는 이유다. 그것은 쉽게 눈에 보이면 ‘안다’라고 생각하는 기본적인 틀을 깨는 것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고착된 생각을 벗고 ‘모르는 것’을 ‘알고’ 출발한 작가이기에 새로운 것을 보고 알아가기 위해서는 파괴, 즉 ‘모른다’는 것의 긍정적인 면을 보다 깊이 응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어쩌면 파괴는 기존의 전통과 일상에서의 일탈을 통해서 자신의 본래 위치를 회복하는 세계-내-존재로 회귀이고, 이를 통해 새로운 일탈(어쩌면 예술가의 숙명이기도한)을 감행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수많은 그림들을 보았거나 기억하고 있는 가운데, 새로운 것을 그리기위해 기존의 고착된 전통이나 일상을 파괴하는 일이 그리 쉽지는 않다. 이 같은 쉽지 않은 파괴의 방식을 박유진은 점과 점 그리고 원과 원이 동일하게 반복되는 것이지만, 동일하지 않은 그 어떤 차이와 거리 두기의 방식으로 감행해간다. 이 반복되는 원과 점의 전개방식은 원을 그리고 그 원에 점을 찍으면서 의도적으로 아주 작은 간격(흰 공백)을 두고 있다. 둥근 선과 선을 채우는 점 사이에 생기는 공백, 이 비워두기는 선과 점의 긴장관계 속에서 망막의 틈새를 미끄러지며 새로운 유기적 관계를 만들어 놓는다. 이것은 점을 점으로 선을 선으로 인지 하면서 본래의 모습 그대로 놓아두는 방식이다. 선과 선을 점과 점을 붙여 놓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모습 그대로 놓아두는 것, 이것이 박유진의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서 시작한 방식이고, 모르는 것을 아는 것에서 출발하고 있는 작가가 보여주는 방식이다.
이러한 작가의 순수한 의지가 만든 점은 스스로 던진 질문에 하나의 답을 얻고 있다. 아마도 그것은 작은 점이 모여 새로운 세계를 구현할 수 있다는 확신이 아닐까. ‘모르는 것’을 ‘알고’ 출발한 박유진의 반복을 통한 확장은 확실히 자신이 무엇을 왜하는지는 알고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점과 선을 통해 자신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의식과 무의식을 교차시키며 잠재의식을 확장시켜가는 것에서 미를 찾는 것은 이제 독자의 몫이다. 나는 때때로 눈으로 보고 있지만, 그 의미를 알지 못하는 것을 여전히 모르면서...
-김옥렬/현대미술연구소&아트스페이스펄 디렉-
전시제목박유진: 반복과 확장
전시기간2011.02.11(금) - 2011.02.22(화)
참여작가
박유진
초대일시2011-02-11 18pm
관람시간10:00am~18:00pm
휴관일월요일
장르선택하세요
관람료무료
장소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ChungJu Art Studio (충북 청주시 상당구 용암동 371-10 )
연락처043-200-61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