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의 시대, 흘러내리는 - 글(유현주)
알브레히트 뒤러 A. Dürer가 그의 작품 <멜랑콜리아 Melancholia (1514)>로 우울함이라는 소재를 예술적 형상화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이후로 우리는 예술사에서 수없이 많은 우울한 인물들의 초상과 만나왔다. 깊은 생각에 빠진 천사를 시작으로 천재들과 화가, 작가와 철학자들까지.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마지막으로 우울했던가. 무력감, 의욕의 저하, 피로감, 조용한 슬픔과 허무감 등의 애수어린 감정을 나타내고 있는 우울증은 뒤러의 시대에는 특정한 직업을 가진 지식인들에게만 허락된 것이었지만 이제 우리 시대에서는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하나의 보편적 현상으로 확대된 듯하다.
류진아 작가의 초상화 작업은 이러한 일상적인 우울증을 앓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을 대단히 독특한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다. 배경은 극도로 생략되어 있으며, 그림 속의 인물들은 표정이 없다. 대신 그들의 감정을 누설하고 있는 것은 놀랍게도 재료다. 우연처럼 흘러내리거나 흔들리고, 또 번져나가는 물감들은 묘하게도 무표정한 그들이 내면으로 숨겨버린 우울한 감정들, 숨길 수 없이 그만 흘러나와버린 필연적인 슬픔과 애잔함을 읽을 수 있게 한다. 이렇게 의미에 관여하는 재료에 대한 발견은 어떠한 트릭 없이 인물의 맨 얼굴, 그리고 그보다 더 숨김없는 내면을 그대로 드러내주는 그녀가 다른 한편으로는 현대미술의 성과를 계승하고 있는 실험적 전통 위에 서 있음을 짐작케 한다. 무릇 더 이상 전달체로만 존재하지 않고 스스로 주제가 되어버린 재료란 바로 형식과 매체가 처음으로 전면에 부각하기 시작한 모던의 가장 큰 특징이었기 때문이다.
흘러내리는 색들은 의도적인 행동과 통제할 수 없는 결과들이 혼합되어 있다는 점에서 실제 인생과도 닮아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그녀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동시대인들의 초상을 인생을 기록하듯 담아낸다. 2003년도 작품인 <무기력> 연작은 이 아무도 도울 수 없는 우울한 감정 속에 잠겨있는 50인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응시하는 순간을 다양한 시점에서 포착해내고 있다. 또한 작가가 2010년 서울로 돌아와 그린 최근작에서는, 서울이라는 대도시가 가진 시대의 우울함이 거리에서 만난 인물들에게 이전보다 한 겹 더 어두운 아우라를 부여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렇지만 이 모든 작품들을 특별히 아름답게 만들고 있는 것은 인물들이 내비치는 보이지 않는 슬픔의 생채기까지 감싸고 있는 작가의 따뜻한 시선이다. 류진아 작가는 10여 년이 넘게 이어지고 있는 초상화 작업의 동기를 다름 아닌 인간에 대한 관심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가장 큰 행복도, 그리고 슬픔도 바로 인간에게서 나온다. 이러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이 바로 그녀의 초상화다.
이제 이 초상화의 인물들과 마주하며 우리는 캔버스 위에 겹치는 우리 스스로의 모습과 대면한다. 작품을 관람하는 우리의 모습은 캔버스 속에서 물끄러미 어딘가를 응시하는 그들과 닮았다. 마치 작가가 <갤러리 관람자 (2008)> 연작에서 형상화해냈듯이 그녀의 작품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예술이라는 거울을 통해 우리 스스로의 감추어진 내면을 들여다본다. 예술의 궁극적인 기능 또한 이러한 성찰이리라.
전시제목Portraits
전시기간2010.11.24(수) - 2010.11.30(화)
참여작가
류진아
초대일시2010-11-24 17pm
관람시간10:00am~19:00pm
휴관일없음
장르회화와 조각
관람료무료
장소갤러리 고도 Gallery Godo (서울 종로구 수송동 12번지 갤러리 고도)
연락처02-720-2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