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 담은 2026년 가을, 이은미 작가의 기획전 «낮과 옆»을 개최한다. 작가는 일상의 조용한 관찰과 산책을 통해 만나는 바람, 나무, 빛 등 자연의 모든 요소를 사유와 관찰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번 전시에서 이은미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대신, 빛과 바람이 스쳐 지나며 남긴 미세한 흔적들을 화면에 겹겹이 쌓아 올린다. 일상 속 공원이나 길가 가로수에서 포착한 순간의 기운과 작가의 주관적 정서가 어우러져, 부드러운 파스텔 톤의 색채와 흐르는 듯한 터치로 표현된다. 보이는 대상 너머의 비가시적인 기운과 시간의 순리를 담아낸 회화 신작들이 공개된다.
저물녘 숲 능선 위로 떠오른 달을 담은 〈해에게〉와, 검푸르게 가라앉은 시간의 결을 그린 〈검고 푸른 시간〉은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순간의 기운을 붙잡는다. 〈그 중에 하나〉와 〈떨어지고 있다〉는 무심히 지나치기 쉬운 자연의 한 조각을 미시적으로 확대해, 흔들리는 붓질 속에 시간의 흐름을 새긴다. 울타리 너머로 뭉게뭉게 피어오른 구름을 그린 〈울타리 밖에도〉와, 검게 뭉친 형상 속에 붉은 기운을 품은 〈충분하다〉는 보이는 대상 너머에서 은은하게 새어 나오는 기운을 화면 위에 눌러 담는다. 해변의 조약돌과 나무 그늘을 겹겹이 쌓아 올린 〈해변에 새긴다〉와 아직 무엇으로도 명명되기 전의 형상을 담은 〈무엇이 되어간다〉에 이르기까지, 이은미의 화면은 대상의 외형보다 그것이 남기고 간 감각과 정서의 잔상을 좇는다.
이번 전시에는 신작 17점이 선보일 예정이다.
작가의 글
빛이 통과하여 진동하는 순간, 아직 이름 붙기 전의 그 떨림이 내 작업의 출발점이다. 자연을 응시하다 보면, 빛도 신이고 시간도 신이라 여겨진다. 매일 같은 나무 곁을 지나도 빛과 바람의 결은 매번 다르고, 그 차이가 쌓여야 비로소 하나의 질서가 어렴풋이 드러난다.
나는 자연을 보이는 그대로 재현하지 않는다. 빛이 스치고 바람이 남긴, 사라지면서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흔적을 화면에 옮길 뿐이다. 그 작은 흔적들이 겹겹이 쌓여 하나의 거대한 장(場)이 되어가는 것- 그것이 지금 내가 자연을 회화 안으로 끌어오는 방식이다.
잠시 반짝이는 것들
박영택(경기대교수, 미술평론)
1. 자연은 무척 난해한 타자다. 아니 모든 타자는 내가 온전히 알기 어려운 존재다. 형태와 색감 그리고 인간이 부여한 이름이 있긴 하지만 그것들은 도무지 궁색해서 대상의 실재에 가닿기 어렵다. 아니 모든 존재의 실재는 결코 가닿을 수 없는 불투명한 영역이다. 그러니 우리가 눈을 뜨고 제 몸으로 자연을 보고 느끼는 일은 상당히 모호한 체험에 속한다. 물론 이는 인간의 몸 바깥에 존재하는 자연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물이 그렇고 인간들이 그렇고 심지어 나조차 낯설고 이해하기 어렵다.
이은미는 자연을 그린다. 자연을 그린 역사는 너무 아득하고 그만큼 무수한 전례가 쌓인 영역이다. 유럽 회화의 역사에서 자연 자체만이 그림의 주제로 부각 된 것은 대략 17세기로 알려져 있다. 신화나 종교 등의 배경에서 빠져나와 비로소 제 존재를 드러낸 것이다. 이후 자연 풍경은 무수히 재현되었고 동시에 표면 너머의 것을 포착해보려는 시도도 뒤를 이었다. 유럽과 달리 오래전부터 자연을 소재로 한 동북아시아의 회화적 전통은 비가시적인 자연의 기운, 이른바 신과 운을 그리는데 기울인 역사다.
이은미는 자신의 작업실 인근에 자리한 공원을 산책하거나, 또는 일상에서 마주한 자연을 그린다. 작품집을 보면 대략 2021년 즈음에 들어서면서부터인 듯하다. 물론 그전에도 작가의 작업은 항상 자기 삶의 근거리에 위치한 대상을 그렸다. 인간이 부재한 건물의 내· 외부를 적막하고, 우울하게 그린 흐릿한 그림이었다. 이후 시선이 막힌, 구석지거나 폐쇄된 공간에서 벗어나 빛을 받아 반짝이는 자연이 등장한 것이다. 당연히 그림이 밝아졌고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렇다고 해도 무엇을 그렸는지 선명하게 다가오는 편은 아니다. 이는 이전 그림과 유사하다. 명확한 형태와 분명한 색채를 지우고 흐릿하고 애매한 형태, 가라앉은 색채의 톤과 부서지는 듯한 터치를 몰고 다니면서 대상보다도 그 대상을 보고 느낀 자신의 주관적인 감정이나 정서를 밀어내고자 하는 그림이다. 사실 대부분의 그림은 작가만의 마음이 문질러진 것이다. 그것이 독특하게 구현되었다면 좋은 그림이 된다. 물론 그 마음이 무엇이며 그런 마음이 왜 일어나는지 그리고 그것을 과연 시각화한다는 것이 무엇이며 또 가능한가 하는 문제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그림이란 결국 그런 것을 구현하려는 난망한 시도가 아닌가?
2. 이은미의 근작에는 하늘, 구름, 바람, 풀과 꽃 등이 등장한다. 작가는 그 자연을 보다 온전히 체득할 수 있는 도심 속에 마련된 공원을 간다. 혹은 길가 가로수나 화단을 관찰한다. 이 자발성이 그림의 동인이다. 비교적 자그마한 캔버스에 유채 물감을 슬슬 칠해나가면서, 톡톡 쳐나가면서 모종의 흔적을 만든다. 전체적으로 풍경을 포착하는 게 아니라 미시적이고 부분적으로 파고들어 만난 자연의 어느 한 부분을, 여전히 구석지고 몰려있는 구도 아래 담아낸다. 아마도 작가는 산책길에 발견한 자연을 사진으로 담아, 사각의 프레임으로 잘라내서 수집/기록한 후에 이를 단서 삼아 그림을 그려갔을 것이다. 흔들리고 이동하는 보행의 시점, 카메라 앵글의 구도, 대상으로 밀고 들어가는 몸의 기울임이 겹쳐 진동한다. 전반적으로 서정적인 파스텔 톤의 부드러운 색채가 잔잔히 흘러 다니고 조심스레 반짝인다. 구체적인 대상의 윤곽을 형성하는 것을 결과물로 여기지 않고 사각형 프레임과 물감/색채와 붓질이라는 회화의 기본 조건을 안고 그 속에 자기감정의 어느 상태를 물질화, 색채화 하려는 가능성을 밀고 나가는 듯하다. 보이는 가시적 대상을 소재 삼아 그것으로 인해 번져 나오는 기운과 감정을 은은하게 누수한다. 그림 속의 대상은 희박하게 등장하는데 그것의 모습은 시간과 흐름 속에서 순간 파리하게 혹은 잠깐의 생기를 지니며 흔들린다. 자연은 생명을 지닌 존재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자기의 생사를 이루어 간다. 자연이기도 한 인간이 그 식물들을 응시한다는 것은 결국 생명체에 대한 이해하거나 거대한 생태계에 속한 자기 존재를 겸허하게 들여다보는 일이다. 그러니 여러 생각과 감정이 일어난다. 이은미는 바로 ‘그것’을 그리고 싶은 것이다. 구체적으로 자리한 자연 대상과 그것을 바라보는 한 인간의 심란하고 헝클어진 생각과 감정이 겹쳐지고 포개어지면서 그림의 형식 안으로 밀려 들어온다.
3. 그림은 결국 붓질과 색채가 전부다. 그것으로 무엇인가를 해내야만 한다. 그래서 작가들은 저마다 자기만의 고유하고 특색있는 붓질과 색채의 톤을 구사하려 한다. 좋은 그림은 그러한 개성으로 충만하다. 그래서 멀리 있어도 한 개인의 체취가 어질하게 밀려든다. 이은미는 애초부터 자신의 고유한 색채의 톤을 지닌 작가로 기억된다. 형태 감각이 아니라 색채에 대한 감각이 앞선 이다. 자연에서 받은 감수성을 색채로 치환한다. 색채를 옮기는 것은 붓질이니 이 그림에서 보이는 일정한 방향으로 물처럼, 빛처럼 흐르는 터치는 자연 대상을 암시하는 동시에 그것을 보는 자신의 흔들리는, 온갖 상념에 부대끼는 마음과 정신을 대리한다. 조심스레 수평으로 밀고 나가는 붓질과 수직의 선들이 교차하면서 새싹이나 풀, 꽃이나 나무줄기를 은연중 보여주거나 가까스로 지시하는가 하면 반짝이는 햇살, 흐르는 구름, 눈부신 하늘, 잔잔히 흔들리는 바람을 안겨준다. 보이는 대상과 보이지 않는 기운들이 공존한다. 그림은 가시적 대상과 그 너머에 자리한 비가시적인 것을 동시에 보여주려는 무모한 아니 불가피한 시도다. 이은미의 그림이 그렇다. 보여주고 싶은 것들, 차마 보여질 수 없는 것들, 표현되고자 하는 것들, 표현되지 못하는 것들이 조용히 부대낀다. 그림은 더없이 적막하다. 당연히 그림에서 소리가 들릴 리가 없다. 그러나 좋은 그림은 우리 몸의 감각기관 전체를 건드린다. 그것은 시각에만 호소하지 않는다. 결국 이 그림은 바람에 흔들리고 햇살에 뒤척이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생장하고 소멸하는 생명체의 부산스러우면서도 더없이 차분하고 비장하며, 아름답게 반복되는 생명의 얼굴을, 자연의 엄정한 순리를, 그 짧고 덧없는 생을 보여준다. 작가의 섬세하고 착한 마음에 치명적으로 스며들었다가 내뱉어진 상처 같은 것이 그림이 되었다.
전시제목이은미: 낮과 옆
전시기간2026.10.23(금) - 2026.11.03(화)
참여작가
이은미
관람시간12:00pm - 06:00pm / 일요일_12:00pm - 05:00pm
마지막 날은 오후 5시까지 입니다.
휴관일없음
장르회화
관람료무료
장소갤러리 담 GALLERY DAM (서울 종로구 윤보선길 72 (안국동) )
연락처02.738.27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