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내용
조해리는 동양화를 전공했으며, 전통 매체인 한지 위에 수묵채색을 사용해 작업해 왔다. 작가의 평면은 구체적인 대상을 이것과 저것으로 구별하거나, 사물들이 서로 뒤섞이는 구성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장면은 처음에는 사실적으로 보이지만, 이내 작가의 사유에서 비롯된 추상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시각적 형상을 지니면서도 그것에 머무르지 않고, 공감각적인 감각이 평면 위의 확장된 공간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데 회화는 중점을 둔다.
작가의 기억은 인물과 자연의 형태 속에서 조용한 분위기를 만들며 소리를 연상시킨다. 유년시절부터 익혀온 해금의 감각이 일상과 만나 형상화된 결과로써, 보이지 않는 감각의 영역 안에서 평면은 하나의 장으로 집결된다. 중요한 것은 사실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실이 머물렀던 시간을 표현하는 것이다. 작가는 그러한 시간을 평면 위에 분위기로 연결 짓는다.
소리로 머물렀던 공간을 평면에 나타내기 위해 작가는 정간보 (井間譜)를 활용한다. 전통의 성격 안에서 정간 한 칸 ‘井’이 지니는 길이와 박의 감각을 시각적으로 옮기려는 시도는, 자신의 일상 속에 정간처럼 축적되고 기록되어 온 소리는 체화를 바탕으로 한다. 그렇게 축적된 소리는 자유로운 형태로 화면 안에 등장하며, 점차 추상화된 경향 속에서 질서로서의 체계를 넘어, 자연의 흐름 안에서 또 다른 공간으로 확장된다.
그림에 등장하는 축적된 정간은 색의 밀도 속에서 오방색과 어우러지며 하나의 풍경처럼 펼쳐진다. 수묵의 층위는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깊이를 동시에 은유하며, 고정된 실체를 드러내기보다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은유한다.
유기적으로 얽힌 점과 선은 하나로 이어지며 나아가는 동양화의 일획(一劃)처럼, 추상의 영역 안에서 다양한 성격으로 표현된다. 여기서 형상은 사물을 분리된 대상으로 보여주기보다, 기운(氣韻)의 관계 속에서 서로 어울리고 스며드는 존재로 표현된다. 형태는 단단히 고정된 실체라기보다, 보이지 않는 움직임이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흔적에 가깝다. 작가는 그림을 그려가는 과정 속에서 그러한 흔적을 발견한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찰자로서 그러한 흔적을 확인하듯, 화면 위에 남겨진 흔적은 자연의 흐름과 어울린다.
작가가 처음 정간을 대하는 태도는 엄격하고 절제된 것이었다. 전통의 형식과 질서를 존중하며, 하나의 음률 안에서 호흡을 맞추듯 진행되는 방식은 마치 정해진 장단 속에서 미세한 변주를 쌓아 가는 음악의 과정과도 닮아 있다. 그러나 그 엄격함은 형식을 고정하기 위한 태도가 아니라, 흐름을 놓치지 않기 위한 집중에 가깝다. 반복되는 정간의 구조 속에서 작가는 미묘하게 달라지는 리듬과 간격, 그리고 그 사이에 스며드는 감각을 따라가며 화면을 구성한다. 그렇게 쌓여가는 흔적들은 자연의 결처럼 유기적으로 이어지며, 형식은 점차 규율을 넘어 하나의 호흡, 하나의 흐름으로 만들어진다.
결국 작가의 작업은 전통을 따르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질서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감각을 길어 올리는 데 이른다. 엄격한 태도에서 출발한 정간은 시간이 흐르며 자연의 리듬과 맞닿고, 화면 위에 남은 흔적들은 소리처럼 번져 나가 하나의 풍경이 된다. 그 풍경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형상이 아니라, 끊임없이 생성되고 사라지면서도 이어지는 기운의 흐름이며, 바로 그 지점에서 작가는 예술이 지속되는 속성을 확인한다.
[작가노트]
[영원에 대한 물음: 중의적 탐구]
나의 작업은 ‘영원(永遠)’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에서 시작된다. 전시 표제인 ‘영원한가(永遠限歌)’는 중의적이다. 소리로 읽으면 “우리의 삶과 예술은 과연 영원한가?”라고 묻는 질문이 되고, 뜻으로 읽으면 보이지 않는 영원이라는 개념의 경계(限)를 탐구하는 노래(歌)가 된다.
[영원의 표상: 천년만세(千年萬歲)와 은하수]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천 년의 수명을 기원하는 국악곡 ‘천년만세(千年萬歲)’의 선율에서 찾는다. 조선시대부터 연주되어 온 이 곡은 주로 실내악 편성의 관현악 합주이다. 나는 그 안에서 해금의 소리에 주목한다. 명주실을 꼬아 만든 해금의 두 줄이 활과 마찰하며 빚어내는 소리는 물과 같다. 형체 없이 흐르고 순환하며 끊임없이 이어지는 그 물성은 내가 추구하는 영원의 표상이다. 수복장생(壽福長生)은 인간의 오랜 염원으로, 전통 회화에서는 일월도, 반도도, 장생도, 신선도 등을 통해 표현되어 왔다. 영원무궁함을 기원하는 이 오랜 도상에 ‘은하수’라는 소재를 더한다. 밤하늘에 흐르는 별들의 강, 은하수는 태고로부터 늘 그 자리에 존재해 왔다. 현대의 빛 공해 속에 희미해졌을지라도, 그 보이지 않는 실존은 불로장생을 의미하는 전통화가 품은 불변의 진리와 궤를 같이한다.
[공감각적 공명: 소리가 남긴 조형적 기록]
나의 화면은 보이지 않는 소리의 공명(共鳴)을 시각적 질서로 구축한 조형적 기록이다. 국악 악보인 정간보(井間譜)를 상징하는 사각형 ‘면’은 시간의 방이 되고, 악기의 명주실은 ‘선’이 되며, 그 사이를 유영하는 감정과 주관적 해석은 ‘점’으로 응축된다. 유기적으로 얽힌 점, 선, 면은 산맥이 되고 파도가 되며, 때로는 숲과 건축물로 변모한다. 사각형 안에는 ‘천년만세’의 음률이 색채로 치환되어 담겨있다. 『악학궤범(樂學軌範)』을 참고하여, 국악의 5음계인 ‘궁상각치우’를 오방색인 ‘황백청적흑’으로 1:1 대응시켰다. 음양오행의 이치를 담은 오방색을 통해 삼라만상의 조화를 꾀한 것이다. 듣는 음악을 보는 그림으로 변환하는 과정, 그것은 유형의 물질을 통해 무형의 그 본질을 담아내려는 ‘이형사신(以形寫神)’의 창의적 해석이다.
[사유의 확장: 찰나에 깃든 영원불변]
무한한 영원[永遠]을 유한한[限] 화폭에 담아낸 사의(寫意)적인 이 노래[歌]를 통해, 나는 다시 한번 묻는다. 영원이란 무엇인가 [영원한가(永遠限歌), What is eternity?]. 은하수처럼 흐르는 색채와 선율의 공감각적인 경험 속에서, 찰나에 깃든 영원불변의 가치를 사유하길 기원한다.
전시제목조해리: 영원한가 (永遠限歌, The songs by string instruments)
전시기간2026.03.13(금) - 2026.04.05(일)
참여작가
조해리
관람시간11:00pm - 06:00pm
휴관일없음
장르회화
관람료무료
장소갤러리 도올 Gallery Doll (서울 종로구 삼청로 87 (팔판동) )
연락처02-739-1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