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한가운데 선 필멸자여!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마치 죽음 같은 것은 ‘전혀 몰랐다’는 듯이 살고 있는 것은 정녕 놀라고도 남을 만한 일이다.”
1)
-알베르 카뮈
전시장이 하나의 미궁이라면, 미궁
2)안으로 기꺼이 들어갈 수 있을까. 미로와는 달리 하나의 길이 얽혀 있기 때문에 그대로 되돌아 나오기만 한다면 길을 잃지 않는다는 미궁은 아리아드네의 실타래
3)를 쥐고 미궁을 탈출한 하나의 선형적 서사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미궁에 들어간 자는 왼쪽과 오른쪽으로 번갈아가며 방향을 바꾸고 중심부와 주변부로부터 가까워지고 멀어지기를 반복하며 결국 중심에 이른다. 안과 밖, 앞과 뒤가 뒤집어지는 경험, 내부와 외부가 이토록 비밀스럽게 연결된 곳에서의 경험은 자기 변화를 불러온다. 미궁에 들어갔다 나오는 경험을 죽음-재탄생으로 읽을 수 있다면, 미궁을 끝까지 걸어갔다 나온 자는 안과 밖이 뒤집힌 자, 새로 태어난 자가 되는 것이다. 목적없는 단순 이동으로 이런 변화를 경험한다면 이것은 다분히 명상적 접근에 불과할 것이다. 우리는 미궁을 맴도는 경험을 통해 전설들, 떠도는 이야기들, 명확하지 않은 메시지들, 명상적 자기 반성에서 빠져나와 우리의 경험이 무엇을 말하는지, 어디로 가는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전민혁이 건네는 실타래를 손에 쥐고, 전시장에 들어서는 우리의 경험은 시선의 역전, 관점의 역전으로 이어져 진리는 때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이라는 단서를 얻어 나올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알지 못하는 영역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빠져나온다는 점에 있어서, 그리고 그 경험이 변화를 불러온다는 점에서 이전에는 몰랐던 하나의 서사적 틀 안에 초대된 것일지도 모른다. 삶의 문제들을 직면하면서 우리가 겪는 어려움은 대개, 대상을 한 눈에 보지 못함 때문이다. 길을 잃고 헤매는 모양, 그 과정이 하나의 모형으로 설명될 수 있다면, 미궁의 모형으로서의 전시장 안으로 기꺼이 들어가 이것이 하나의 환상성을 경험하는 것에 불과한지, 진실성을 경험하는 것에 도달할지 시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더더욱 삶과 죽음이란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갖고 있다면, 옥죄어 오는 답답함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지 고민을 시작할 것이다.
미궁의 중심에 무엇이 있나. 그곳엔 아무 것도 없다. 질문에 대한 답도, 답답함에 대한 해소도 없다. 그곳은 그저 길이 끝나는 곳이며, 걸어온 길이 뒤집히는 곳이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해서 중심에 도달하고 다시 되돌아 나오기를 반복한다. 그럼으로써 미궁의 길이 말해주는 유연함과 단서들 안에 스며들고, 단독자로서의 나를 설명하는 서사가 무엇인지 질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미궁에 들어가고 되돌아 나오는 반복은 “왜?”라는 동력을 이끌어낸다. 우리의 답답함을 삶의 모호함, 도저히 알 수 없음, 불명확성 등으로 밖에 설명할 수 없다면 우리 존재에 대한 근거를 어떻게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인간의 인식 능력은 이제 처음 말을 배우는 어린 아이에게도 들을 수 있는 물음, “왜 그래?”에서도 본다. 멈출 곳을 알지 못하는 이 “왜?”라는 물음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하여, 그것의 존재 이유에 대하여, 즉 그 일이 일어나야 할 정당한 권리를 묻고 있다. 그렇다면 존재자로서의 나에 대한 물음, 나를 둘러싼 삶에 대한 물음, 세상에 대한 물음, 그리고 삶과 죽음에 대한 물음은 어디를 향할까.
전민혁은 이번 전시에서 총 4개의 영상작업과 10여개의 사진작업, 그리고 설치작업을 선보인다. 전민혁은 이번 전시 《먼 곳에서의 노래》에서 오랜 시간 그 안에 침잠해 있던 물음들을 길어올린다. 렌즈를 통해 인간을 담아내는 과정에서 받아들여온 모호한 경계, 명확히 규정하거나 알아 볼 수 없는 지점, 원인과 결과를 가릴 수 없는 장면, 정확히 알 수 없는 시간대, 인식의 선입견을 파고들어 포착하는 감각적 순간 등 그가 쫓아왔던 물음이 《먼 곳에서의 노래》 안에서 떠오르지만, 그는 여전히 명백한 해석을 내놓지는 않을 것이다. 전민혁은 오히려 그의 의도가 명백하게 해석되지 않기를, 해석될 수 없음을 작품을 통해 강력한 의지를 갖고 말하고 있다. 이야기의 결말이 결여된 전개는 여러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겠지만, 작품 하나하나를 정확하게 대입하여 설명하는 것은 이번 전시를 이해하는데 의미 없는 일이기도 하며, 어쩌면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설령 작가가 사용하는 비유와 상징이 각각 정확하게 해석된다고 하더라도, 작가는 전시장 안에서 느낄 수 있는 전체적인 움직임을 재현하거나 각 작품들의 연결을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숨겨놓은 비유와 상징이 작가가 의식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 이상으로 말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종결되지 않은 이야기의 결말을 쫓기 보다는 이야기의 발단에서 드러난 징후와 단서들 몇 개를 알아차리는데 집중하게 될 것이다.
이야기의 시작이거나 클라이맥스일 수도 있고, 결말에 다다른 추격신이거나 꿈을 꾸는 것 같은 장면의 연속일 수도 있을 영상작업 <쫓기-는>을 처음 봤을 때, 나는 이야기의 발단만 계속 되는 끝도 없는 소설을 읽고 있는 듯 했다. 어느 페이지를 펼쳐 읽어도 앞뒤의 전개가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쫓는다는 것은 쫓을 대상이 있는 것이고, 쫓긴다는 것은 쫓아오는 대상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 삶은 수동성과 능동성을 동시에 갖는다. 외부에서 도래하는 상황을 받아들인다는 면에서 수동적이고, 상황을 겪는 주체가 된다는 면에서는 능동적이다. 처한 상황은 나의 의지로 선택한 것이 아님에도 그 안에서 선택하고 겪으며 배워나가는 과정, 수동적인 상황에서도 자신의 주체성을 확보하려는데서, 삶의 모순이 온다. 전민혁이 사용하는 ‘수동적 능동태’는 절대적이고 근본적인 전제가 없이 주어진 불안한 삶 안에서 그 불안을 직시하는 태도로 삶의 의미와 가치를 만들어 갈 수 있다는 역설로 읽힌다. 삶 자체가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는 점에서 이미 역설적이지만, 삶에서 몸으로 감각하며 심지어 고통의 경험까지 받아들여 인간다움으로 나아간다고 보는 전민혁의 입장이 삶을 바라보는 수동적 능동태의 관점을 수긍하게 한다.
<죽음(앞에서)의 춤>은 페스트를 겪은 시대에서 영감을 얻었다. 14세기 유럽의 전체 인구 중 1/3이 흑사병으로 사망한 것을 생각할 때, 죽음과 삶에 대한 경험은 많은 관점의 변화를 가져왔다. 주술적이고 종교적인 기이한 형태의 의식들이 일어났고, 두려운 죽음 앞에 혼돈의 현실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했다. 죽음 앞에 선 두려움의 표현과 자신의 생을 확인하는 몸짓으로서의 춤이 혼재한다. 인간은 반드시 죽게 된다는 명백한 사실 앞에 있지만, 인간은 죽음으로 가는 여정의 근원조차 알 수 없다는 무력감이 1/8배속 느리게 촬영한 몸들 사이에서 피어난다. 그러나, 알 수 없음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 도리어 삶에 대한 동력으로 기능하는 것은 아닐지, 느린 몸짓의 교차와 집단적 움직임을 다시 한번 바라보게 된다. 죽음에 관해 생각할 수 있는 존재, 왜 사는지, 왜 죽는지에 관해 철학하는 존재는 인간뿐이다. 반드시 죽게 되는 인간의 한계 앞에서 유한한 생의 가치를 묻고, 삶을 일굴 수 있는 존재로서 인간은, 끝없는 알 수 없음 안으로 자신을 밀어넣어 죽음과 삶의 문제 안으로 계속 파고드는 것이다. 늘어지는 모션과 얼굴의 클로즈업이 두려움과 고통, 희망과 안도의 교차와 반복으로 이어지며 영원성과 유한성을 동시에 경험하게 한다. <쫓기-는> 안의 두 인물은 영원히 잡히지 않고 잡지 못한 채 작품 안에 갇혀있고, <죽음(앞에서)의 춤>의 몸들은 최소한 작품 안에서 생을 이어간다.
3층에 전시된 영상 < Ting-a-ling-a-ling >의 인물은 답답한 문제를 인지하지만, 그 원인을 알 수 없다. 모든 문제에 전문가가 있는 현대사회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알 수 없는 문제들을 안고 산다. 어쩌면 그 문제가 여전히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이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구토』
4)에서 로캉탱에게 찾아온 구토는 일종의 침전물을 끌어올리는 의식과 같다. 삶이 직면한 문제, 존재에 대한 의문, 본질에 대한 물음을 안고 침전된 그것이 끊임없이 올라온다. 현대인들이 경험하는 심리적 구토 역시 지금의 시대가 겪는 여전한 알 수 없음과 연관이 있다.
미궁 속에서, 사건 속에서, 이야기 안에서 단서들은 감각적으로 숨어있다. <박명>시리즈는 어두움과 밝음이 혼재되어 있어 낯선 존재가 다가오는 것을 알 수 없는 상황, 세상의 이면, 불확실성이 고조되는 시기를 은유하는 개와 늑대의 시간을 보여준다. 불확실한 상황에서 결정할 수 밖에 없는 한계 안에 살지만, 그 선택에 자신하는 인간의 모습이 박명시에 머문다. 밝음에서 어둠에 적응하고, 어둠에서 밝음에 적응하는 시각적 순응은 지금의 박명시를 지나 밤으로 갈지, 새벽으로 갈지조차 알 수 없다.
설치작업 < Portrait > 앞에서 우리는 보려고 할수록 보지 못하고, 알려고 할수록 알 수 없는 답답함,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를 직감한다. 우리는 때때로 이유를 알 수 없이 당황하게 되는 의외의 상황에 처한다. 이 경험은 3층에서 볼 수 있는 영상 <세이렌의 침묵>과도 연결된다. 세이렌의 노랫소리를 따라 찾아간 화자는 말하지 않는 세이렌을 마주한다. 찾고자 하고, 보고자 하고, 만나고자 하고, 알고자 하는, 인간의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는 여정은 이렇듯 “왜?”라는 물음 안에서 제자리 걸음을 한다. 존재 이유와 원인을 알 수 없다면 습관처럼 존재하는 삶을 극복하려는 의지도 덧없는 것일까. 우리 삶을 칼로 자른 단면처럼 덩그러니 존재하는 것이 아닌 구조적 맥락 안에서, 하나의 서사 안에서 해석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알 수 없음의 시대에서 부유하는 개인을 서사적 관점에서 들여다보고 싶다. 전민혁의 작업이 인간 삶의 거대한 부조리인 생-죽음에서 시작하여, 삶의 모순, 그리고 삶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모호함 너머의 이야기로 나아갈 수 있는 하나의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매킨타이어
5)의 예를 들어보자. 나는 정류장에 서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그때 나의 옆에 서 있는 청년이 나에게 갑자기 말을 건넨다. “흔한 들오리의 이름은 히스트리오니쿠스 히스트리오니쿠스 히스트리오니쿠스(histrionicus, 들오리를 칭하는 라틴어)입니다.” 그가 발언한 문장의 의미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문제는 그가 이러한 발언을 통해 행하는 것이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다. 그는 미쳤을 수도 있다. 다만 몇 가지 배경 안에서 그의 발언을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혹시 그가 어제 도서관에서 야생 오리에 관해 대화를 나눴던 사람과 나를 혼동했다면, 또는 그가 심리치료 중 낯선 사람에게 가서 아무 말이나 건네보라는 처방을 받았다면, 또는 러시아 스파이로 접선을 위한 암호를 사용했다면, 그의 이 행위는 하나의 이야기 속에 편입되어 자리를 찾을 수 있고, 이해 가능해진다.
6)
실제 우리 삶의 사건과 질문들은 버스정류장에서의 낯선 발화처럼 모호함으로 가득하다. 전민혁은 맥락의 부재 자체를 시대의 전제 조건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관람자를 버스정류장의 청자로 설정하여 그의 작품 앞에 서게 한다. 그럼으로써 그는 완결되지 않은 삶의 이야기 앞에, 명확히 전달할 수 없는 의미의 불가능성 앞에서 계속되는 발화의 용기를 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매킨타이어에 의하면,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려면, 먼저 “나는 어떤 이야기의 일부인가?”라는 질문에 답해야 한다.
전민혁의 이야기에는 결말과 종결이 없다. 그는 이야기를 마무리하지 않을 뿐더러 질문을 남겨두는 것으로 결말도 없이 종결되지 않는 이야기를 꿈꾼다. 그는 ‘모름’을 그 자체로 남겨두었다.
그러나, 그가 남겨둔 ‘모름’의 진짜 모습은 ‘알고 싶음’이다. 알 수 없음 뒤에 숨은 알고 싶음, 모호함 뒤에 숨은 명확함, 이해 안 됨 뒤에 숨은 이해하고 싶음, 안들리는 말은 듣고 싶고, 안보이는 것은 보고 싶은, 그 모든 ‘모름’과 ‘알고 싶음’에 관해 전민혁이 던지는 물음이 《먼 곳에서의 노래》 안에서 드러난다. 이제 모호함의 커튼이 걷히고, 미궁의 중심부에서 정직하게 뒤돌아 나올 수 있다. 그것으로 우리는 반전의 경험, 역전의 경험을 꾀한다. 작가의 이야기는 미궁의 경험으로부터 스스로를 깨워 다시 질문을 남길 것이다. 불확실성 앞에서 던졌던 모호한 질문이 베일을 벗고 우리를 각성하게 할 정직한 질문으로 남겨진다. “너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1)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김화영 옮김, 책세상, 2025, p.32
2) 미궁(Labyrinth)의 원형은 크레타 문명과 연결되어 알려져 있으며, 자진해서 미궁으로 들어간 테세우스가 아리아드네의 도움(아리아드네의 실타래)으로 나올 수 있었던 신화를 배경으로 한다. 크레타에는 원래 미궁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구조물은 없었다는 의견과 애초에 주술적, 제전적 춤이 상상의 구조물로 변환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르네상스 이후 발명된 미로(maze)는 한 번 들어가면 빠져나오기 힘든 구조로 제작되었으나, 미궁은 하나의 길이 복잡하게 얽혀있어 되돌아 나오기만 하면 다시 빠져나올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3) 미궁으로 들어간 테세우스에게 아리아드네는 칼 한자루와 실타래를 쥐어주는데, 입구에 실을 묶어 그대로 되돌아 나올 수 있었다는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다. 테세우스가 아테네의 새로운 왕으로 세워지면서 전해진 전설이다.
4) 장 폴 사르트르, 『구토』, 임호경 옮김, 문예출판사, 2020
5)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 『덕의 상실』, 이진우 욺김, 문예출판사, 1997
6) 위의 책, p. 401-402
글 | 주시영(아트센터 예술의 시간 디렉터)
■ 작가 소개
전민혁은 인간의 불완전성과 삶의 불가해성을 직시하면서도, 그 안에서 무한한 가능성과 아름다움을 발견하려는 시선을 가진다. 이를 위해 인간이 가지는 근본적 한계와 여기서 비롯되는 여러 부정성(否定性)들을, 가능성을 사유하며 의미 있는 것을 생산해 내게 하는 하나의 ‘장치’로 사용한다. 비일상적 상황과 환경, 각종 통제와 억압, 불합리와 부조리 등은 그에게 어떤 ‘가능성의 조건'이 되는 것이다. 마치 카프카가 그려내는 ‘실패하고 좌절한 자의 기이한 아름다움’처럼, 작가는 이러한 부정적 맥락 속에서 삶에 대한 심오한 통찰과 새로운 깨달음을 이끌어내려 한다.
주요 개인전으로는 《집에서 나설 때쯤》(매홀창작스튜디오, 경기, 2022), 《Corpus_몸》(송은아트스페이스, 서울, 2021), 《미시적 사물》(서점다다, 서울, 2019), 《Inside Out》(송은아트큐브, 서울, 2012), 《당신이, 당신을 볼 수 있는 한 가지 방법》(갤러리 아트사간, 서울, 2011)이 있고, 《(no-reply)회신을 원하지 않음》(아트센터 예술의 시간, 서울, 2024), 《”충돌, 공존, 경계”》(갤러리 스테어, 서울, 2023), 《송은 수장고》(송은아트스페이스, 서울, 2017-2018), 《예술적 생존법 연구》(대안공간 루프, 서울, 2017), 《돌我봄》(송은아트스페이스, 서울, 2016), 《SUMMER LOVE》(송은아트스페이스, 서울, 2015), 《이어지다_Tie》(갤러리 이앙, 서울, 2013), 《부산비엔날레》(부산문화회관, 부산, 2012), 《대구사진비엔날레》(대구문화예술회관, 대구, 2012), 《제 12회 사진비평상 수상전》(갤러리 이룸, 서울, 2011) 등의 그룹전에 참여하였다.
전시제목전민혁: 먼 곳에서의 노래
전시기간2025.07.05(토) - 2025.08.09(토)
참여작가
전민혁
관람시간월-금 10:00~18:00
토 12:00~19:00
휴관일일요일, 공휴일 휴관
장르사진
관람료무료
장소아트센터 예술의 시간 Art Centre Art Moment (서울 금천구 범안로9길 23 (독산동) 2층)
주최아트센터 예술의 시간
후원㈜영일프레시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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