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이 보충되는 불완전한 기호
이선영(미술평론가)
이다 작가의 개인전 〈덩어리모서리 소리〉에 발표된 ‘PROTO-Painting’ 연작은 팝업 같은 경쾌한 형태와 선명한 색감을 가졌지만, 회화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진지한 탐구를 깔고있다. 작가는 기계적 스펙터클의 범람이라는 현대적 환경 속에서 점점 그 입지가 좁아지며 스스로 고갈되고 있는 현대회화의 지속 가능한 방식을 탐색한다. 그 하나의 방법으로 회화의 시작이지만 그 자체는 회화가 아닌 기호들에 주목한다. 가령 유적으로 남아있는 동굴벽화나 갑골문자 등이 그것이다. ‘PROTO-’라는 키워드처럼, 작가는 추상도 구상도 아닌 더 원초적 단계로서의 원시적 기호와 회화의 교차점에서 추상성을 찾는다. 추상화가 지시 대상을 괄호 치듯이, 작가 또한 미지의 언어 환경에 한동안 놓이면서 내용을 초월한 기호에 유희적으로 접근할 수 있었다. 유럽에 교환교수로 다녀온 이후 발표된 ‘Linear A-’로 제목이 붙여진 시리즈는 비교대상이 없어 언어화되지 못한 유럽 고대 문자들에서 영감을 받았다.
발굴 단계에 있는 이 유적지의 문자들은 글자로 추정되나 읽을 수 없는 상태다. 문자는 선으로 형태화되고 완성된 문장 또한 선적인 논리에 따르기에, 이전의 구술문화의 한계를 극복함과 동시에 단선적 논리라는 또 다른 한계를 가진다. ‘덩어리모서리 소리’는 다양한 차원에서 기호적 현상에 접근한다. 일상어에서 덩어리는 실재적이지만 현실화되지 못한 것을 말한다. 석탄 덩어리가 에너지원이 되려면 모종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모서리는 한 번 이상의 가공을 거친 것이다. 레비 스트로스의 비유에 의하면 날것이 아닌 익힌 것이고, 자연이 아닌 문화에 속한다. 그러나 자연이나 문화로 충분한가. 이다가 전시 제목으로 압축한 세 개의 단어는 이항 대립을 극복하는 제3의 요소를 끌어들인다. 작품이라는 결과로 볼 때, 소리는 뿌리도 줄기도 아닌 꽃에 해당한다. 3항은 라캉의 실재계/상상계/상징계처럼, 실체라기 보다는 관계적이다.
덩어리가 원석 같은 것이라면 모서리는 보석으로 가공한 단계일 것이고, 소리는 사회의 상징적 질서에서 가치를 부여받는 것과 비교될 수 있다. 사회의 물신적 체계에 들어서야 원석이든 보석이든 의미가 부여되고 소통/유통될 수 있다. 경매사가 어떤 물건을 흥행시킬 때, 소비자의 탄성이 곧 가치의 정점에서 터져 나오는 ‘소리’일 것이다. 다시 이다의 작품으로 돌아오면, 최근 전시에서 자주 사용하는 밀랍, 무엇보다 화가의 주재료인 유성 물감 등이 모두 덩어리들이다. 그것들이 작가의 손을 거쳐 안착하는 사각 캔버스나 종이 같이 정제된 표면은 모서리에 해당한다. 이번 전시에서 한 공간을 차지하는 드로잉 작품군은 작가가 만든 딱딱한 기구로 물감을 종이에 얇게 펼쳐 기호적 형상을 만드는 방식으로, 덩어리의 극적인 변신을 보여준다. 이다의 작품은 ‘물감이 발린 평평한 표면’으로 축약되는, 추상화로 이어진 근대미술의 정의에 머무르지 않는다. 말 그대로 덩어리와 모서리는 소리로 승화되고자 한다.
소리는 언어나 음악같이 문법에 의해 작동하지 않는다. 미술의 주 감각인 시각은 가장 고차원적인 감각답게 관념에 얽혀있다. 자명하게 받아들여지는 상식이든 공고한 이데올로기이든 초월적인 형이상학이든 말이다. 이다는 그러한 관념적 시각성을 벗어나고자 그동안 여러 재료를 연구해 왔다. 시각의 자리를 대신하는 소리에는 촉각적인 면이 있다. 좋은 소리는 시원한 바람처럼 불어오며, 감도가 높은 음향기기는 감상자를 완전히 감싸는 듯한 사운드를 송출한다. 작가가 영감을 얻은 기호의 세계는 보다 원초적 성격을 띠는데, 그것은 시각적인 촉각성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점자 같은 것으로 축소될 것이다. 밀랍 층이 가세함으로써 생기는 미묘한 공간감은 모더니즘의 이상적인 시각처럼 한눈에 그 전모가 파악되지 않는다. 정사각형 화면 안에 획과 획이 겹치고, 획의 그림자도 밑바탕에서 비치는 작품들은 이번 전시에서도 연속된다.
읽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힘 있는 단호한 형태들이 펼쳐진다. 롤랑 바르트가 주장했듯이, 대개 소비로 귀결될 읽기보다는 쓰기를 독려한다. 문자의 속성인, 이런저런 각도의 가지는 분절화된 선은 추상적 필획과 연결되었다. 유적은 흔적일 뿐 온전한 형태가 아니어서 해석학적 상상력이 요구된다. 누군가를 향해 발신된 메시지는 본래 빈칸을 담고 있다. 시간의 시험을 견뎌낸 잔여물은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가 말한 ‘열린 예술작품’이 된다. 불완전한 기호가 야기하는 끊임없는 해석학적 상상은 고고학, 역사, 과학과 함께 예술도 공유하는 과정이다. 회화는 보이는 상태 이외의 어떤 것도 지시하지 않는다는 미학적 규범, 즉 예술의 자율성을 회화가 확보한 것은 근대 이후의 일이다. 하지만 자율성 이전에 더 기나긴 소통의 역사가 있었다. 이다의 작품은 미술의 역사보다는 기호학적인 접근을 요구한다. 안느 에노는 《기호학사》에서 관념은 언어를 통해 형태가 갖추어지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소쉬르의 주장을 인용한다.
소쉬르의 학설에 의하면 모든 언어의 공통된 자질은 차이와 체계성이다. 그것은 모든 의미체계에 내재한 규약으로 간주된다. 기호학적 맥락에서 이다의 불완전해 보이는 기호들은 투명한 소통과는 거리가 있지만, 필획 같은 형태로 강조된 분절적인 선은 ‘차이들로 이루어진 체계’(소쉬르)를 나타낸다. 물론 원초적 단계이기에 체계적이지는 않다. 차이의 감각을 고양시키는 중층적 화면은 명백한 의미(의식)가 아닌 것들을 암시한다. 이다가 사용하는 독특한 재료인 밀랍은 자크 데리다가 《글쓰기와 차이》에서 인용한 프로이트의 ‘매직 메모’를 연상시킨다. 매직 메모는 무엇인가를 쓰고 그것을 들어 올리면 이전의 글자가 지워져서 다시 쓰기를 반복할 수 있는 판 형태의 장난감이다. 그러나 글의 지속적인 흔적이 밀랍 판 위에 유지되어 적정 조명 속에서는 읽힌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밀랍 판은 사실상 무의식을 나타낸다. 교대로 글이 지워졌다가 보이게 되었다가 하는 것은, 기억 속에서 의식의 나타남과 스러짐에 비견된다. 이전의 흔적을 남겨둔 듯한 이다의 화면도 새로운 기재 공간을 생성한다. 기호 이전에는 기호도 사물도 이미지도 아닌 원초적 형태가 공존했을 것이다. 작가는 그 ‘사이들’에 주목했다. 경계에 있는 것들은 ‘이것도 저것도 아님’과 동시에 ‘이것도 저것도’이다. 이미지가 반쯤 섞인 상형문자는 중요한 매개고리가 된다. 소통의 역사에서 종이의 발명도 현대의 컴퓨터 못지않은 혁명적 사건이었다고 볼 때, 더 오랜 시간 동안 기호는 바위나 나무껍질 점토 등 사물 위에 새겨졌다. 이다가 화면에 반투명한 밀랍을 도톰하게 도포하여 그 전후에 이미지/기호를 그리는 것은 ‘PROTO-’ 단계에 근접하려는 선택이다. 일반적인 회화의 관례에서 왁스는 그려진 것이나 색칠된 것을 모호하게 하는 ‘이물질’에 해당하지만, 이다의 작품에서 독특한 효과를 자아낸다.
2021년 개인전 제목 〈일렁〉처럼 중층적인 이미지, 따스함, 촉감 등이 그것이다. 손상된 피부에 바르는 바셀린처럼 이 반투명 물질은 조각난 기호의 원상회복을 도와줄 듯하다. 그런 재료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요셉 보이스가 치유와 회복이라는 의미로 평생 사용했던 지방 덩어리일 것이다. 어디선가 떨어져 나왔을 조각들은 잃어버린 고리를 찾아 서로의 접촉을 활성화한다. 다른 색으로 칠해진 필획들은 얽히고설킨 복잡한 양상을 더욱 강조한다. 이다의 회화와 드로잉에서 형상들은 육감적이다. 그림은 만지면 안된다는 금기를 위반하는 촉각적 표면이다. 이것은 유화 물감의 스퀴지 터치와 함께 시각적 촉각성을 자극한다. 이 부분은 스펙터클의 범람에서 회화가 자기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중요한 대목이다. 이다는 그럴듯한 회화적 아우라를 위해서가 아니라, 보다 원초적인 감각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여정에서 촉각성을 만났다. 앞으로 입체의 차원으로 밀랍의 물성을 확장할 계획도 가지고 있다.
슬쩍 만져보면 꿉꿉한 것이 물질이 아닌 유기물의 느낌이다. 통상적으로 그림은 완벽하게 밑 작업이 된 천 바탕이나 매끄러운 종이에 미끄러지듯 그려지지만, 이전부터 붓의 사용을 자제해 왔던 이다의 회화는 그리기와 만들기의 중간쯤에 속한다. 여러 재료와 기법을 통해 만들어진 중층적 화면은 미술의 여러 분야를 동시에 전공한 작가의 이력도 떠올린다. 이번 전시에서 작은 방 하나를 채울 ‘PROTO-Drawing’ 연작 또한 작가가 고안한 ‘알루미늄 붓’으로 그려졌다. 마치 혁필화 같은, 금속판의 탄성을 이용한 드로잉은 붓 못지않은 자유로운 유희의 장이다. 부드럽지 않은 금속판을 사용한 드로잉은 지시 대상으로부터 자유로우면서 기호적 추상 회화에 필수인 분절화된 형상이 특징이다. ‘PROTO_Painting’ 연작처럼 다채로운 색감과 분절화, 흐름의 결합이다. 동질이상의 시리즈를 통해 작품들 사이의 잠재적 운동을 만들며, 작가는 회화의 전통적인 매체를 벗어나면서 전형적인 시각성 또한 벗어나려 한다.
촉각은 청각과 함께 시각보다 하위 감각으로 간주되어 왔다. 원초의 단계로 역행하는 과정은 고등 감각으로 간주한 시각성을 반성하게 한다. 자크 데리다는 《글쓰기와 차이》에서 레비나스를 인용하면서 시선은 그 자체로는 타자를 존중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소리를 빛 위에 위치시키는 레비나스는 “사유는 언어인데 그것은 빛과 유사한 경로가 아니라 소리에 유사한 경로로 사유된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청각은 색깔이나 형태 등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소리와 신체적인 것의 진동과 관계되어 있다. 자크 데리다는 말과 글은 진정 그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다시금 몸짓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몸짓에서 논리적이고 논술적인 의도는 축소되거나 종속된다. 데리다는 언어와 논리의 분절이 아직 완전히 냉각시키지 못한 절규를, 즉 모든 말 속에 잔존하는 억눌린 몸짓이 거부되기를 바란다. 데리다가 예를 든 이상적인 예술가는 의성어에 가치를 부여한 아토냉 아르토이다.
이 극작가는 모방적 언어도 명사의 창조도 아닌, 단어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순간의 초입으로 관객을 안내한다. 그것은 대본의 재현이 아니라 언어들의 기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아르토는 이렇게 몸짓과 말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를 통해 옛날의 주술적 효과를 되찾고자 했다. 언어 기호 이전에 소리가 있지 않았겠는가. 인간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언어는 (대개 어머니로 대표되는) 타자로부터 소리로 듣고 배우게 된다. 그것은 이후의 외국어나 과학적 부호 등의 습득 과정과 달리 무의식적이다. 작가는 이 원초적 단계를 ‘추상 본능’이라고 말한다. 미술사에서 추상을 개념의 진화로만 보는 것은 일면의 진실이다. 중층적 표면으로 이루어진 이다의 작품에서 아래층에 깔린 것들은 언제든 위로 올라올 수 있으며, 그 반대 방향도 마찬가지다.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 여러 통로를 마련해주는 것, 그것이 ‘덩어리’, ‘모서리’, ‘소리’라는 다양한 키워드를 병렬하게 했다.
‘소리’라는 키워드로 작가가 담으려고 했던 움직임은 작품 하나에서 작품들 간, 시리즈별로 내재되어 있다. 음의 파동을 떠오르게 하는 ‘PROTO-Drawing’ 연작이 선율이라면, 다양한 음색의 공시적 조화가 있는 ‘PROTO-Painting’ 연작은 화음이다. 소리로 대변되는 움직임은 생명의 느낌이다. 살아있는 것은 행동한다. ‘기운생동’이라는 말처럼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형상이나 문자를 쓰는 것은 동양 미학의 오래된 희망 사항이기도 했다.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은 문자추상, 서체 추상의 흐름도 있지만, 이다의 경우 풍부한 색감이 가세한다. 작품의 생산 주체로 비유하자면, 관념적 서사에 능한 선비가 아니라, 활동적인 현대 여성이다. 밀랍으로 도포된 표면은 빛까지 발산하여 파스텔 톤의 다채로운 색과 반응한다.
보편적인 장식의 전통도 굳이 피해 갈 이유가 없다.
연필이나 붓 같은 ‘고등한’ 기구 이전, 필기구라는 기능과 무관한 사물로부터 생겨난 스트로크는 ‘PROTO-Drawing’이 되었다. 고대의 관례처럼 물질 위에 각인된 듯한 형태다. 이다에 의하면 붓은 사람을 예민하게 드러낸다. 하지만 붓은 획의 전형이 아니며, 자신은 붓을 떠난 스트로크가 좋다고 말한다. 붓에 회의적인 작가는 ‘붓 아닌 것’으로 필획을 실험한다. 붓을 상대화하려는 이다는 컴퓨터 프로세스도 적극적으로 도입한다. 십수 년 전에 박영 레지던시에서 작가를 처음 봤을 당시에도 화폭과 붓 대신에 시트지나 에어브러시로 작업하고 있었다. 컴퓨터의 활용은 물론이고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화면에 물감이 마르는 시간까지 더하며, 이다의 작품은 면밀한 계획하에 제작된다. 하지만 정작 완성된 형태는 불완전한 기호다. 불완전성은 지속적인 보충을 요구한다. 메시지는 발신자가 보낸 완벽한 기호로서 읽히기보다는, 수신자의 공조가 필수다.
밀랍 표면 처리 전후에 이미지가 자리한 화면은 그림자를 포함한 여러 층이 공존하는 듯이 보인다. 유화로 단호하게 칠해진 형태는 이미지가 아니라 기호이며, 정확히 무엇인가 지칭하는 기호가 아니라 기호 이전의 단계, 또는 이후의 단계이다. 이다의 화면 밑층을 형성하는 밀랍은 실은 고대 로마 시대에도 사용되었던 오래된 미술 재료이다. 빛바랜 종이 같은 우윳빛 색감의 오래된 미디엄은 작가만의 처리 과정을 통해 보다 단단한 구조로 변하지만, 그 재료가 가지는 본질은 유지된다. 반투명 재료는 계속 겹쳐 그려진 고대의 동굴벽화나 암각화의 공간감을 연상시킨다. 종이의 발명 이전의 양피지에 쓰인 문자처럼, 알레고리와도 같은 중층적 과정은 그려진 것들을 불투명하게 한다. 이상적인 기호는 메시지를 완전하게 전달하는 투명성이 특징이지만, 원초적 기호는 투명하지 않다. 이에 더해 이다의 기호는 실제처럼 그림자마저 가지고 있다.
각 분야에서 발전의 지표는 물질의 저항을 극복하는 것이라 할 때, 미술은 여전히 투쟁 중이다. 회화가 몸과의 유대를 지속하는 것은 몸 또한 완전히 코드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전에 실제였던 것들을 코드화시키는 정보기술의 시대에, 몸은 여전히 완전하게 코드화될 수 없는 회화의 조건이다. 작가는 기호의 원천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동시에 궁극적으로는 기호를 초월하는 회화의 본질을 암시한다. 해체주의가 말하듯 ‘말소하에 놓인’ 기호적 형상은 기호를 본질이나 대상이 아닌 끊임없는 차이의 계열로 의미화한다. 불완전한 차이의 체계인 기호는 이중적으로 시간을 요구한다. 에른스트 카시러는 《인문학의 구조 내에서 상징 형식 개념》에서 의식은 시간 형식에서 해방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의식의 특징적인 본질은 시간 형식에 들어있고 시간 형식에 바탕을 둔다. 시간의 축을 따르는 기호는 고정되지 않고 표류한다.
고정되지 않는 기호들은 신비하다.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는 《해석의 한계》에서 “신비주의적 표류”의 대표적인 특징으로, 시니피에에서 시니피에로, 유사성에서 유사성으로, 연결고리에서 또 다른 연결고리로 미끄러지는 과정을 말한다, 물론 고대와 현대의 차이는 있다. 고대의 기호현상은 현대처럼 보편적이고 일의적이며 초월적인 시니피에의 부재를 주장하지 않는다. 에코에 의하면 고대의 기호현상은 강력한 초월적 존재, 즉 신플라톤적 절대 존재가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모든 것을 가리킬 수 있다. 《해석의 한계》에 의하면 전체와 무, 그리고 모든 것의 표현할 수 없는 근원인 신플라톤적 절대 존재는 상호지시적이고 미로식의 거미줄과도 같은 조직망을 통해 모든 것이 모든 것과 연결될 수 있도록 작용한다. 고대의 기호현상은 이 세상의 위대한 텍스트가 그렇듯이, 모든 텍스트에서 시니피에의 부재가 아닌 시니피에의 완전함을 확인한다. 궁극적인 시니피에는 접근 불가능한 비밀일 수밖에 없다.
반면 현대의 기호현상은 “현실은 절대적 개체가 존재하지 않는 연속체의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무한한 해석이 가능”(퍼스)하다. 퍼스에 의하면 기호들과 사물들의 이 같은 미로식 여행은 여행 자체의 즐거움을 제외하면 어떠한 목적도 갖지 않는다. 원시적 기호에 대한 탐구를 통해 현대회화에 접근하는 이다의 작품은 미지의 언어를 대할 때의 느낌으로 다가온다. 의미를 모르는 낯선 언어를 만날 때 형태와 소리가 먼저다. 읽을 수 없는 형태는 이미지를 닮았으며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는 소리로 증폭된다. 그것은 의미와 대상을 괄호치고 형식에 집중하게 하는 심미적 전략이다. 반복되는 끝자로 인해 율동적으로 읽히는 제목 〈덩어리모서리 소리〉는 분절화되지 않거나 주변화된 나머지들이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작품 형상들이 아름다운 잔여물 같은 느낌을 주는 것과 유사하다. 명백히 코드화되지 않는, 분류되지 않는 나머지 것들은 타자화되곤 한다. 하지만 현대철학은 동일성의 몸통이 바로 타자라고 말한다.
전시제목이다: 덩어리모서리 소리 BODY EDGE WAVE
전시기간2024.10.25(금) - 2025.11.26(수)
참여작가
이다
관람시간01:00pm - 06:30pm
휴관일일, 월, 공휴일
장르회화
관람료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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