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사이드 템포러리는 2월 6일부터 2월 28일까지 주인공이 사라져 버린 ‘부재’의 세계를 통해 존재의 진정성에 대해 질문하는 권소진 작가(b.1991)의 개인전 《벌새를 보았다》를 진행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작가가 그간 캔버스 안에 머물러 있었던 세계를 전시를 보는 공간으로 침투시켜 확장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마룻바닥에 전시된 신작 두 점은 바닥에서 나무 무늬 벽지로 변해 찢겨 나간다. 그 안에 묘사된 다른 차원 혹은 또 다른 벽지를 연상시키는 표현을 통해 실제 현실과 작품의 층위를 보다 자유롭게 넘나든다. 또한 바닥과 연계된 작은 창문처럼 보이는 신작 < Humming >은 눈이 녹으면 곧 사라질 찰나의 글과 그림을 묘사하며 전시의 출발점이 되는 작가의 어린 시절 기억으로 안내한다.
정교하게 재현된 현실을 오려내는 붓
과거에 그는 화단에서 꽃의 꿀을 빨고 있는 벌새를 보자마자 집으로 뛰어가 벌새를 봤다며 소리쳤다. 20여 년이 넘게 그에게 특별했던 이 기억과 믿음은 최근 한국에 벌새가 없다는 사실과 ‘벌새인 척하는 나방’이라는 영상을 보며 흔들리게 되었다. 이 경험을 기반으로 작가는 생각했다. 상상 속 벌새를 실제로 보았다는 것이 중요하여 진실이라 믿었던 어린 시절처럼, 진실과 거짓을 가르는 것은 개인의 가치에 따라 상대적인 것은 아닐까. 진정한 것과 거짓된 것을 가르는 기준에 대해 질문하기 위해 작가의 붓은 가위가 되어 정교하게 쌓아 올려 재현된 현실을 오려낸다. 계속해서 재현할 대상을 프린트하고, 오리고 붙여내 재조합하여 현실을 거듭 재현하고 비워낸다. 이렇게 만들어진 ‘부재(不在)’의 세계는 ‘재(在)’를 상기시키는 아이러니한 세계가 형성된다.
이와 같은 작가의 작업 방식은 ‘재현’이라는 개념에 대한 작가의 탐구를 반영한다. 오랜 시간 동안 회화는 ‘재현’에 상당 부분 빚을 져왔다. 재현을 의미하는 단어 ‘representation’, 즉 ‘다시(re)’ ‘드러낸다(present)’라는 말에는 항상 원래의 대상, 원본이 전제되어 있다. 재현은 원본과의 일치를 추구하지만, 작가에게 있어 그 일치의 가능성은 불완전하고 상대적이다. 작가는 작품의 배경을 세밀하게 재현하고 서사적인 제목을 붙여 사건의 흐름을 암시하지만 결론적으로 재현의 대상이 결여되어 있다. 관람객들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각자의 해석을 내리게 되고, 결국 그 대상은 상상 속에 머물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그림으로 보는가.” 라는 작가의 질문에 대해 고민해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작품 <그림자 도둑>에서 사라져 버린 주인공은 그를 지칭하기도 하며, 오려낸 조각을 훔쳐간 또 다른 이를 암시하기도 한다. 작품은 그려진 것과 복제된 것(프린트), 그리고 이 모든 레이어를 뚫어내는 하얀 구멍으로 이루어진다. 구석에 작은 벌새를 찾아낸다면, 유일하게 존재하는 그림이 아닌 벌새를 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진짜 벌새일까? 이처럼 관람객은 상상하는 것과 재현된 그림, 실제 사물과 나의 기억, 어떤 것에 진정한 가치를 두느냐에 따라 상대적으로 작품을 읽어내게 되며, 작가가 던진 질문에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될 것이다.
작가노트
사라진 것들은 그림으로
-벌새를 보았다
벌새를 보았다. 어린 나는 화단에서 꽃의 꿀을 빨고 있는 벌새를 보자마자 집으로 뛰어가 벌새를 봤다며 소리쳤다. 엄마는 믿어주지 않았지만, 동화에 나오는 파랑새를 본 것 같은 추억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환상적인 기억으로 남아있다.
꽤 최근에서야 한국에는 없다는 벌새의 정체를 알게 되었는데, 유튜브 숏츠를 넘기다 우연히 본 ‘벌새인 척하는 나방’이라는 영상은 내가 20년 넘게 벌새라 착각하고 살아왔던 시간을 허탈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던 거짓말 같은 외침에 대한 통쾌함을 자아냈다.
한 번쯤 기억할만한 나의 주인공들. 어릴 적 본 벌새의 기억(벌새인 척하는 나방이었지만). 어렴풋이 기억하는 첫사랑. 좋아하는 소설 속 주인공의 얼굴들. 때로는 이것이 사라지거나 왜곡될지라도 기억의 강렬함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이처럼 가슴속에 품었던 주인공들은 현실에서, 일상에서 끊임없이 진정성과 거짓말을 가르는 선택의 순간에 직면하게 된다. 우리는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설명할 수 없지만, 무엇이 진정하지 않은 것인지를 쉽게 나열해보곤 한다. “그는 진정한 사랑은 아니었어요”라 말할 수 있는 까닭은, 진정한 것에 한발짝 다가갔음을 의미한다.
소설 <피터팬>에서 주인공은 떨어져 나간 자신의 그림자를 잡기 위해 이리저리 날아다니다 소녀 웬디를 만나게 된다. 웬디가 피터의 발 끝에 그림자를 꿰매어주고 나서야 비로소 주인을 떠나 또 다른 주인 행세를 하던 그림자는 제자리로 돌아간다. 그림 속 주인공들은 어리거나 찢겨져 나가 실체를 알 수 없다. 이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진정할 것이라 유도하지만, 그 속에 드리워진 그림자만이 그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어느 것 하나 실체가 없이 모두 그림이다. 사라진 남자를 바라보는 듯한 블라인드 너머의 남자는 사실 그림이다. 그 남자가 망원경을 통해 본 장면 또한 오려낸 종이조각처럼 보인다. 남자가 보았다며 남긴 관찰일지에는 벌새의 잔상만이 존재할 뿐이다.
나는 ‘왜 그림이어야 하는가’ 이전에 ‘우리는 무엇을 그림으로 보는가’에 대해 질문하고자 한다. 어린아이가 그린 낙서 같은 동그라미를 엄마라 부르고, 아빠라 부르는 것처럼, 주인공과 그림자, 사물과 그림, 그림과 그림자는 ‘무엇에 진정한 가치를 두는가’에 따라 상대적으로 읽히게 된다. 거짓말이 주인공이 된 세계와, 주인공이 사라져버린 세계 속에서 진위를 가려내려는 시도는 이처럼 우리가 무엇에 가치를 둘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진정한 것과 거짓말을 알아챌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때로는 거짓말을 앞세우는 것, 혹은 진정한 것이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막연한 믿음 이전에 그것이 사라져버렸을 때 비로소 마주하는 진정한 것들을 들여다보자.
전시제목권소진: 벌새를 보았다
전시기간2025.02.06(목) - 2025.02.28(금)
참여작가
권소진
관람시간10:00am - 06:00pm
휴관일월, 공휴일 휴관
장르회화
관람료무료
장소아트사이드 갤러리 GALLERY ARTSIDE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6길 15 (통의동, 갤러리 아트싸이드) 아트사이드 템포러리)
연락처02-725-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