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자와 죽은 자 가운데
주시영(아트센터 예술의 시간 디렉터)
여러 개의 방을 가진 크거나 작은 건물을 생각해 보자. 각 방의 벽마다 크기가 다른 캔버스가 걸려 있다. 다양한 영상과 미디어, 조각과 설치 작품들이 공간을 채우고 있다. 잠시 머물며 보게 되는 작품도 있고, 스쳐 지나가는 작품들도 있을 것이다. 손에 쥐고 있는 플로어맵을 따라가며 작가의 이름과 작품의 제목들을 읽는다. 사람들은 흥미로운 작품 앞에 잠시 서서 케이크 한 조각을 즐기듯 작품을 즐긴다. 전시를 관람한 그들은 더 풍부해진 것도 아니고, 빈약해진 것도 아닌 채 전시장을 떠난다. 그리고 다시 일상생활에 파묻힌다. 그들은 왜 여기에 왔을까. 예술을 경험한다는 것이 예술 작품의 내용을 파악하거나, 예술가의 의도를 알게 되거나, 더 나아가 예술을 이해하게 되는 것과 연관이 있을까. 현대미술에 있어 이 과정과 질문은 혼란스럽다.
예술가는 어디를 향해 외치고 있는가.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은 아무 것도 듣지 못한 상태가 되어, 굶주린 영혼은 굶주린 채 돌아간다.
1)
벤야민이 말한 경험의 빈곤
2)은 우리가 일상적인 경험에서 느끼는 마음의 빈곤에 관해 일부 설명해 줄 수 있다. 과학적으로 검증되었다고 믿을 수 있게 된 사실들, 숫자들, 통계들을 더욱 신뢰하게 되면서 개인의 특별한 경험은 점차 중요하지 않은 시대가 되었다. 테크놀로지의 발전은 대부분의 사람들을 비슷한 경험의 틀 안에 모이게 한다. 비슷한 목표를 성취하고자 달려가는 한국인들은 놀랍도록 다를 바 없는 경험치를 안고 있다. 개인의 경험이 가진 이야기를 허용할 여유가 없는 사회는 나와 다른 삶을 사는 이들의 이야기로도 연결되지 못한다. 무엇보다 스마트폰을 손에 쥔 지금의 시대가 경험할 수 있는 삶의 모양은 개인이 경험할 수 있는 자기 너머의 세계를 단조롭고 납작하게 만든다. 경험의 빈곤과 서사의 빈곤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각 세대 속에 스며들어 문화화되고 있다.
매끈하고 반짝이는 대리석 표면 같지만, 그 안은 텅 빈 플라스틱 같은 문화에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우리 내면의 공간이다. 빈곤과 결핍의 문화는 개인의 공허한 내면을 모른척 한다. 의미있는 경험에서 차단되기 때문에 내면의 공간은 점차 아무 것도 없음의 상태, 즉 죽음의 상태를 경험하고 있다.
예술가는 빈곤하고 공허한 내면의 상태를 채우는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가는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자신에 관해 말할 수 있는 사람, 자신과 세계의 연결을 시도하는 사람, 서사의 빈곤으로 죽음이 드리워진 문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는 사람이다. 이야기하는 힘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내면의 사건들을 잇는 새로운 실을 뽑아낼 수 있어서 고립되지 않은 관계들을 형성할 수 있다.
3) 묻혀버린 개인 고유의 이야기를 꺼내어 분절된 현재에만 몰두하는 현대인들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는 이들이 있다면, 그것이 예술가의 고유한 책무이자 특권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가는 먼저 이야기의 힘을 경험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서사를 통해 경험한 아름다움으로 예술가는 우리 삶을 어울림의 감각으로 가득 채워 우리에게 존재의 이유를 말할 수 있다. 아름다움의 최상의 형식은 삶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위대한 선물들 중 하나이다. 이것이 예술이 가치 있는 진정한 이유이며, 예술가만이 줄 수 있는 것이다.
4)
좋은 소설은 인간의 삶에 관한 놀라운 비유로 우리를 깨우치고, 좋은 시는 시대를 정화하는 힘을 가졌다. 예술은 컨텍스트context, 즉 시대와 사회적 맥락 안에 텍스트text를 내놓는 일이며, 그것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 과정이다. 텍스트는 예술가의 삶과 고뇌가 녹아있는 작품, 시, 소설, 음악, 영화와 같은 형태의 작업으로 표현되어 다른 삶 안에 울림을 남긴다. 시각예술은 어떠한가. 현대미술은 어떤 이야기를 펼칠 수 있고 나눌 수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누가 예술가인지, 무엇이 예술인지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
아름다움과 추함을 규정하기는 어렵다. 이것은 아름답고 저것은 덜 아름답다고 말하기 어려운 것 처럼 아름다움의 가치와 기준을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우리 안에는 아름다움을 감지할 수 있는 ‘무엇’이 있다고 어렴풋이 말할 수는 있다. 아름다움을 경험하는 일은 직접적이고 감각적이고 본능적인 느낌으로 판단하는 주관적 선호에 대한 진술이라기보다 보편적 가치와 연관된 것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우리 각자의 감각에 내포된 것은 우리가 함께하는 삶이 가능하고 가치있게 되는데 필요한 것이 일치한다는 감각이다.
5) 예를 들어 모두를 즐겁게 하고 분위기를 선순환하는 농담이 있다고 하자. 그것은 좋은, 또는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는 농담이 될 것이다. 반면에 불쾌하고 기분을 불편하게 하는 농담이 있다면 그것은 나쁜, 또는 저급한 농담이 될 것이다.
6) 적절한 유머를 구사함으로써 대화에 참여하는 이들을 좋은 방향으로 즐겁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컨텍스트에 맞는 텍스트를 적절하게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다. 숨겨진 보편적 감각이 우리 안에 내재하여 아름다움을 느끼는 보편적인 기준으로 적용되는 것이다.
아름다움을 감지하는 것은 자연을 관조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경험하는 경이로움과도 유사하다. 자연을 바라보는 경험, 자연의 변화와 아름다움 앞에서 느끼는 숭고함과 경외감을 통해 예술이 선사하는 아름다움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는 자연의 아름다움 앞에서 우리 자신을 긍정할 수 있는 존재로 스스로를 자각하고 자유를 느끼고 채움을 경험한다. 예술은 아름답기 때문에 우리 마음에 울림을 남긴다. 그리고 예술은 무언가를 의미하기 때문에 아름다울 수 있다. 예술은 아름답지 않고도 의미가 있을 수 있으나, 아름답기 위해서는 반드시 의미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7) 삶에서 아름다움의 의미를 경험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다시, 살아있는 느낌과 죽은 느낌으로 연결된다. 삶을 살아있다고 느끼게 하는 요소들이 있고 죽은 것 같다고 느끼게 하는 요소들이 있다. 어쩌면 권태 같은 요소들이 우리를 죽음의 느낌으로 이끌 수도 있을 것이다. 권태는 현대인들이 분주함 속에 자아를 잃어버린 상태, 자기 상실의 상태로 볼 수 있다. 과거와 미래와는 철저히 단절된 채 현재의 시간 안에서만 살기 때문에 맥락의 연결에서 배제되어 더욱 자기 안으로 스스로를 가두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서서히 사라지기 때문에 없어지는지도 모르는 것들, 갉아먹는 것들의 공격으로 우리는 살면서도 죽음을 경험한다. 또는 삶과 죽음 사이에서 살아가고 있는 듯 보인다. 어쩌면 죽음을 경험하고 있으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느낄 수 있다. 메뚜기 떼가 와서 모든 것을 앗아갔을 때에야 비로소 죽음의 상태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화석화된 삶은 모르는 척 살아가는 삶이다. 외면하고 시선을 돌리는 삶, 벌거벗겨진 내면의 공허함과 빈곤을 모르는 척하는 데 익숙해진 삶이다.
과거에도 그랬고, 미래에도 그렇겠지만, 우리는 언제나 산 자와 죽은 자 가운데 살아간다. 무엇이 살았고, 무엇이 죽었는가. 누가 살아있지만 죽은 삶을 살고, 누가 죽은 듯 보이지만 살아있는가.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이 혼재하는 가운데 덩그러니 놓여진 상태에 있는 이들은 주로 깊은 존재론적 고민에 잠긴 예술가다. 예술가는 자신의 삶과 작품을 통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낼 자유와 선택 앞에 살아가며, 죽은 듯 잠자는 자들 가운데 더욱 산 자로 살아가기를 선택하는 자다.
아름다움이 우리 세계에서 감지되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가 마치 아름다움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예술가는 현재를 살지만, 현재에 속했다고 할 수는 없으며, 이들은 현재 안에서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반추하고 항상 다른 방식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선보일 자유를 택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선택하고 어떤 길을 가리킬 것인가.
알브레히트 뒤러의 동판화 〈멜랑콜리아 Ⅰ〉는 서양 전통의 멜랑콜리 담론을 집약시킨 작품으로 평가된다. 말하자면 서양 예술가의 초상이다. 천상으로부터 영감을 얻었지만 인간의 약함으로 고뇌와 우울, 고통에 휩싸인 모습을 담은 뒤러의 천사는 이후 모든 예술가의 자화상이 되었다. 당대의 철학자들은 자신의 시대를 어둡고 음울하게 그리고 있는데, 이런 점에서 현대를 규정하는 근본 분위기 역시 멜랑콜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시대에는 희망과 절망이 공존한다. ‘희망 없음’으로 진단한 시대에 관해 말하는 이들, 또는 희망을 기대하는 이들에게 말할 수 있는 이들은 당대의 시대적 고민과 개인의 존재론적 고민을 안고 있다. 예술가는 결국 보이지 않는 것을 헤집어 놓기를 반복하며 고뇌하고 고민하는 존재이며, 음울한 분위기로 진리를 탐구하는 존재로 살아간다.
공허하고 메마른 문화 가운데 사는대로 수긍하는 죽은 자가 아닌, 자기 너머에 존재하는 ‘무엇’을 알고자 철학하고 고민하는 ‘산 자’는 모두 ‘멜랑콜리아적 인간’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시대적 컨텍스트 안에서 예술작품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 그것으로 이야기를 확장하여 다른 이들의 이야기와 연결을 시도하는 이들은, 어쩌면 심연 깊은 곳에서 살아있는 이야기를 길어올리는 사람으로서 현재의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지 않을까. 예술가는 작품에 아름다움의 내용과 정신을 담을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하며, 그 아름다움의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현재의 아름다움이 진실한 아름다움으로 전달될 수 있도록 감각하고 감지하여 자신만의 작품으로 내놓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다. ‘산 자’로 살아가고자 한다면, 이 역할은 작품을 보고 있는 당신에게도, 그리고 이것에 대해 말하고 있는 나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책무일 것이다.
------------------------------------------------------------------------
1. 칸딘스키의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중 일반론에서 ‘예술을 위한 예술’에 관해 설명하는 내용 일부를 현대의 전시장 상황에 맞게 각색하여 새로 썼다. 바실리 칸딘스키,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권영필 옮김, 열화당, 2023, pp.21-22.
2.1933년 벤야민의 「경험과 빈곤」이 발표되었다. 원래의 제목은 ‘경험의 빈곤’이었으나, 편집자에 의해 ‘경험과 빈곤’으로 변경되었다. 최성만, 『발터 벤야민 기억의 정치학』, 길, 2014, p.293.
3. 한병철, 『서사의 위기』, 다산북스, 2023, p.71에서 한병철이 인용한 마르셀 프루스트의 말을 재인용했다.
4. 로저 스크러튼, 『아름다움』, 미진사, 2013, p.139.
5. 로저 스크러튼, 『아름다움』, 미진사, 2013, p.146.
6. 로저 스크러튼이 아름다움과 가치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에서 사용한 농담의 비유에서, 개념을 가져와 재해석하여 사용했다.
7. 로저 스크러튼, 『아름다움』, 미진사, 2013, p.128.
■ 《산 자와 죽은 자 가운데》 전시 연계 프로그램
라이브 초상 대화 프로그램: 우리가 존재하는 시간
정고요나 작가와 참여자가 만나 “간직하고 싶은 말”을 주제로 1:1 대화를 나눈다. 대화하는 동안 정고요나 작가는 참여자의 초상을 드로잉한다.
*참여자의 인물 드로잉은 가져가실 수 있습니다.
■ 진행: 정고요나 작가
■ 대상: 성인, 총 10명
■ 일시: 12월 19일 목요일 ① 1부 15:00-16:00 ② 2부 16:00-17:00 (*1부 / 2부 중 택 1)
■ 비용: 10,000원
■ 신청: 구글 설문지 신청
https://forms.gle/GJF5813A6R8g2Xci7
■ 장소: 아트센터 예술의 시간 4층 전시장
전시제목산 자와 죽은 자 가운데 amidst the living and the dead
전시기간2024.12.07(토) - 2025.01.25(토)
참여작가
금혜원, 김시하, 김원진, 박보나, 손선경, 오묘초, 장보윤, 정고요나, 정수, 한석경
관람시간월-금 10:00~18:00
토 12:00~19:00
휴관일일요일, 공휴일 휴관
장르사진, 설치
관람료무료
장소아트센터 예술의 시간 Art Centre Art Moment (서울 금천구 범안로9길 23 (독산동) 2층)
주최아트센터 예술의 시간
후원㈜영일프레시젼
연락처02-6952-0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