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아트는 뉴욕 브루클린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김호재(Ho Jae Kim, b. 1993-)의 개인전, 《CASTAWAY》를 개최한다. 미국에서 유년을 보낸 뒤, 현재까지 뉴욕에서 삶을 이어가고 있는 작가는 주로 ‘중간성’, ‘경계선’과 같은 ‘사이 공간(in-between space)을 중심으로 작업을 전개해 왔다. 그는 최근 하퍼스(HARPER'S, 뉴욕, 로스앤젤레스, 이스트 햄튼), 니코딤 갤러리(Nicodim Gallery, 로스앤젤레스) 등에서 개인전을 가졌으며, 크리스티(Christie’s, 뉴욕), 소더비(Sotheby’s, 뉴욕) 와 같은 세계적인 옥션사의 단체전을 통해 작품을 선보인 바 있다. 이 외에도 JP모건 체이스(JPMorgan Chase), 모건 스탠리(Morgan Stanley), X 뮤지엄(X Museum, 베이징) 등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본 전시는 국내에서 최초로 선보이는 작가의 개인전으로, 문학, 영화, 철학, 미술사 등에서 차용한 다양한 시각 요소를 개인의 경험을 투영해 그려낸 신작 13점을 선보일 예정이다.
김호재의 전시 《CASTAWAY》는 작가가 정체성을 탐구하는 과정 속 마주한 동명의 영화 '캐스트 어웨이(CASTAWAY, 2000)'에서 시작되었다. 무인도에 표류하는 4년간의 시간이 그려진 이 영화에서 주인공 척 놀랜드와 배구공 '윌슨'은 김호재의 작업에 주요 소재로 등장한다. 윌슨은 탈출 직전까지 섬 생활을 함께하는 주요 등장인물이자 주인공의 유일한 말동무이면서, 동시에 주인공이 자기 자신을 대입하는 존재이다. 김호재는 영화에 나온 무인도를 작업실에, 조난자를 ‘자신’에 빗대며, 작품 속 ‘윌슨’의 도상은 창작자인 작가 본인의 초상이자 그가 창조해 낸 작품의 투영체로 여긴다. 작품이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수년 전, 작가는 섬에서 척이 느꼈을 고립감에 공감했다. 뉴욕에서 첫 개인전을 열기까지, 그는 그림들만 덩그러니 있는 작업실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며 누군가가 그림들과 자신의 존재를 알아 봐주길 간절히 원했다. 작가는 무인도에 표류하는 영화 속 등장요소들과 자신의 상황을 연결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탐구, 정체성에 대한 사유를 이어간 것이다.
김호재는 이러한 불투명한 자신의 상황을 ‘연옥’에 비유했다. 당시 작가는 식당 지배인, 클럽의 관리인, 과외 선생과 같은 다양한 직업을 작업과 병행하였는데, 이는 작가 스스로가 일종의 ‘연옥’ 속에 있다고 비유하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서 ‘연옥’은 지옥과 현실 사이에 위치한 추상적인 공간으로 종교적 어원을 가진 단어이나, 김호재는 이를 현대인의 삶에 존재하는 이분법적인 경계의 중간 지점으로서 인식했다. 즉, 진로나 정체성에 대한 고민,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동하는 비행기 안, 소속감의 부재 등, 마치 특정할 수 없는 연옥의 개념처럼 그를 둘러싼 배경들이 불특정하기 때문이다. 이에 김호재는 “작가들은 각자의 유배지에서 윌슨을, 다시 말해 그들의 역사와 철학, 열망과 경험의 물리적 현현이라 할 수 있는 예술 작품을 창작한다. … 예술 작품을 창작하는 과정은 외적인 실천이자 내적인 투쟁에 다름 아니다.”라 말한다. 김호재는 자신과 많은 이들이 겪는 자아실현의 과정을 구현하기 위한 하나의 장’으로서 ‘연옥’과 ‘무인도’를 탐구하는 것이다.
한편, 김호재는 비단 '캐스트 어웨이(2000)'뿐만 아니라, 『모비 딕』(Moby-Dick, 1851), 『걸리버 여행기』(Gulliver's Travels, 1726), 『파리대왕』(Lord of the Flies, 1954) 등 다양한 문학 작품에서도 영감을 얻었다. 그의 작품 속엔 거인의 신체, 대왕 향유고래의 꼬리, 돼지의 머리, 물고기 인간 등 상상 속의 존재들이 혼재하는데, 이는 작가가 실제 자신의 이야기와 상상 속 이야기라는 간극을 통해 다시 경계에 대한 탐구를 드러내는 것이다. 특히 본 전시의 출품된 작업들의 가장 큰 특징은 인물의 형상이 멀리서 비추는 밝은 빛과 역광으로 인해 실루엣으로만 보인다는 점이다. 작가는 이러한 빛의 실루엣들을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에 비유했다. 동굴 속 그림자와 같이 우리가 보는 실재는 재현된 이미지 즉, 이데아로서 김호재는 역광과 검은 실루엣으로 이데아를 표현함으로써 보는 이가 실재와 재현의 중간점에서 작품을 탐색하도록 유도했다.
이처럼 복제와 묘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김호재의 조형 언어는 학부 시절부터 오마주 해왔던 화가이자 수학자인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Piero della Francesca, 1415-1492)의 작업 방식을 재현하는 것에도 드러난다. 피에로의 회화는 정밀한 원근법과 정확한 구도가 그 특징인데, 수학적으로 정확한 수치를 기반으로 그려낸 그림 속 인물과 풍경은 현실감을 넘어 어딘가 기묘하고 신비롭게 느껴지는 불편함(Uncanny)을 유발한다. 김호재는 이러한 피에로의 정밀한 시각 언어가 재현하는 현실과 비현실 사이의 틈을 현대적인 방식으로 구현하고자 했다. 예를 들어, 피에로는 "카툰(cartoons)"이라고 불리는 상세한 드로잉을 그린 뒤, 드로잉에 구멍을 뚫고, 그 위에 석탄 가루를 뿌려 이미지를 복제하는 방법인 "스폴베로(Spolvero)"기법을 사용해 벽에 그림을 전사했다. 이후 그는 전사된 도상 위에 석고를 바르고 그 위에 안료를 도포해 채색하여 작품을 완성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피에로의 방식을 오마주 하기 위해 김호재는 3D 모델링을 통해 그려낸 정교한 밑그림을 잉크젯 프린터를 이용해 캔버스에 전사한다. 전사된 면 위로 석고 대신 글루를 여러 겹 도포한 뒤 밑그림을 따라 조각하고 마지막으로 채색을 진행한다. 이렇게 서로 다른 매체가 겹겹이 쌓아 올려지는 과정은 때로는 형상을 모호하게 드러내기도 하고, 때로는 강조하면서 독특한 질감을 만들어 낸다. 하지만 피에로와 달리 김호재는 얼기설기 쌓아 올려진 매체 위를 안료로 덮어버리는 대신, 일부를 노출하여 작품에 시간성을 부여한다. 작업실에서 홀로 쌓아온 시간의 중첩을 보여주듯, 그의 작품은 채색이 완료된 단편적인 표면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 다양한 매체가 거듭 포개져 생긴 층위를 그대로 노출한다. 여느 르네상스 화가와 같이 성서의 장면을 정밀하게 ‘재현’했다는 느낌을 주는 피에로의 회화에 반해, 김호재의 그림은 유화, 잉크, 글루, 목탄 등의 재료가 한 화면에 뒤섞인 특징적인 표면과 서사, 그리고 작가가 창조한 세계가 한데 모인 파스티슈(pastiche)다. 이와 같이 작업의 과정 또한 “자아의 확장”이라 여기는 작가는 캔버스를 시간과 일생의 이야기를 담는 그릇으로 인식하며, 이를 통해 관객으로 하여금 그의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장을 마련하고자 했다.
본 개인전의 제목이자 전시 주제인 《CASTAWAY》의 '조난자', 즉 작가는 고립에 안주하며 막연한 미래에 대한 불안을 내비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그가 만든 세계를 가상으로 인식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현실의 자아를 되찾고자 하는 혼성의 공간을 형성한다. 그의 작품은 그가 무인도이자 연옥에서 탈출하기 위한 '물리적 수단'이며, 현실을 넘어 이데아를 찾고자 하는 '탐험의 길'이고, 혹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기 위한 '심리적인 사이 공간'으로서 수많은 서사와 등장인물이, 주체와 대상이 구별 없이 섞여 들어간 '혼성의 공간'이다.
평론
층과 층 사이에서
권태현
하나의 그림은 다양한 물질들로 이루어진 층을 가진다. 면, 석고, 풀, 기름, 안료, 흑연, 목탄 등 통상적으로 쓰이는 물질만 나열해도 회화가 얼마나 복잡한 물질들의 연합으로 만들어져 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것은 작은 스케일에서 일종의 물질적 지층을 이룬다. 지층이라는 비유가 가능한 까닭은 그것이 화학적 반응을 불러일으킬 시간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회화의 지지체 위에서 서로 다른 물질들은 뒤섞여 화학적으로 결합되기도 하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다른 층과 구분되는 독립적인 표면을 형성하기도 한다. 지지체에 여러 물질로 이루어진 혼합물을 얹은 뒤 시간을 두고서 층을 켜켜이 쌓아 올리는 방법이 회화에서는 흔히 사용된다. 화가들은 때때로 이전 층이 마르기 전에 다른 물질을 더하여 층의 경계를 이상하게 섞어버리거나, 면의 일부분에만 물질을 올려 레이어의 순서를 복잡하게 꼬아버리는 전략을 택하기도 한다. 이런 물질적 층의 문제는 오랜 시간에 걸쳐 발달한 회화의 주요한 테크닉이고, 회화라는 영역은 이러한 방법론을 그 전통과 역사 안에 체화하고 있다. 김호재는 다양한 물질들과 그것으로 형성되는 이미지, 상징, 알레고리, 픽션, 때로는 텍스트의 층위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흥미로운 방식으로 매개한다.
그의 그림은 가장 겉면만 보아도 다양한 층위가 포착된다. 표면의 질감을 만들고 있는 미디엄과 그 위에 얹혀진 유화의 형태가 이질적으로 충돌할 때도 있다. 안쪽 레이어의 연필로 쓴 텍스트가 투명한 미디엄으로 덮여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무엇보다 유화층 아래에 직사각형의 네모난 프레임 형태가 반복적으로 나열되는 모습이 곳곳에서 눈에 띈다. 그것은 작가가 캡션에도 남겨 놓았듯, 잉크젯 트렌스퍼(inkjet transfer)의 흔적으로 보인다. 컴퓨터에서 생성한 모델링 이미지를 잉크젯프린터로 종이에 뽑은 뒤, 캔버스의 밑바닥에 풀을 칠하고, 이미지가 인쇄된 면과 캔버스면이 만나도록 붙인 다음, 종이를 벗겨내면 인쇄한 이미지가 캔버스에 전사(transfer)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디지털 이미지를 캔버스에 물질적으로 옮길 수 있다. 여기에서 핵심은 단순히 이미지를 그대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디지털로 만들어진 이미지가 유채 물감을 비롯한 다양한 물질들과 같은 위상으로 지지체에 얹어진다는 것이다.
이미지는 항상 특유의 물질성과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작가는 전사된 디지털 이미지 위에 젯소와 안료를 다시 덮는다. 그곳에서 디지털 이미지는 거칠게 손과 붓으로 그려지는 유화의 바탕이자 지지체가 된다. 컴퓨터로 모델링한 기하학적 이미지와 항상 계산에서 벗어나는 회화적인 영역이 겹쳐지는 것이다. 같은 면에서 다른 층으로. 그렇게 컴퓨터로 만든 이미지는 다른 물질로 덮어지지만, 연이어 붙은 A4용지가 만들어낸 격자 무늬는 회화의 지층에 울퉁불퉁 물질적으로 흔적을 남기고 있다.
김호재는 이러한 방법론을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Piero della Francesca)에 대한 연구와 연결 짓는다. 프란체스카는 이른바 콰트로첸토(Quattrocento, 쉽게 초기 르네상스로 불리는 이탈리아의 1400년대)를 대표하는 대가 중 한 명이다. 그의 그림에는 기하학적 건축 구조나 인체의 형상이 눈에 띈다. 비슷한 시기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가 쓴 이론서 「회화에 대하여」(De pictura)는 기하학적 테크닉을 중심으로 그림을 그리는 방법을 정립한다. 그 방법론 중에서도 ‘코멘수라티오’(commensuratio)를 가장 핵심적인 요소 중 하나로 꼽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코멘수라티오는 ‘통용되는,’ ‘상응하는,’ 더 어원적으로 접근하면 ‘단위를 공유하는’ 정도의 뜻을 가진다. 이런 맥락에서 프란체스카 같은 당대의 화가들은 수학적 방법론으로 대상의 형태를 옮기는 테크닉을 연마하였고,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선원근법이나 투시도법이라고 부르는 시각적 체제와 연결된다. 문제는 그렇게 소실점, 직선, 비례, 격자 등으로 구성된 대상의 형태가 오히려 부자연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는 것이다. 살아 움직이는 몸을 가진 우리가 감각하는 세계는 그렇게 기하학적으로 구성될 수 없기 때문이고, 한편으론 이른바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라고 불리는 문제도 발생한다. 김호재의 작업은 컴퓨테이션 기반의 이미지와 회화적인 물질성,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교차하며 이러한 문제를 다룬다.
물론 ‘불쾌한 골짜기’ 같은 말은 정신분석 이론과 거리가 있는 인터넷 밈과 같이 사용되는 개념이지만, 수학적으로 구성된 형태를 손으로 그려내는 회화로 번역하면서 발생하는 기이함을 언캐니(uncanny/unheimlich)와 연결 짓는 것은 특기할 만하다. 독일어의 어근을 톺아보면 드러나듯 unheimlich는 새로운 존재나 완전한 낯섦에서 느껴지는 것이 아니다. 집과 같이 가장 친숙했던 것이 이전과 다르게 감각될 때, 우리는 unheimlich하다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분명 같은 것이 반복되고 회귀하는데도 기이한 낯섦이 느껴지는 감각과 연결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의 신체가 로봇이나 인형, 조각 같은 것들과 겹쳐 보이는 상황에 그 말이 쓰인다. 여기서 김호재의 작업에 조르조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를 연상시키는 형태, 도상, 색채 등이 드러난다는 점을 짚어볼 수도 있다. 김호재의 작업에는 다양한 측면의 미술사적 양상이 반복적으로, 또 역사적 순서와 상관없이 등장한다. 역사적이라기보다는 고고학적으로. 지층을 뚫고 과거의 사물들이 오늘날의 지면에 모습을 드러내듯. 과거의 형식과 도상, 그리고 방법론은 김호재의 회화면에 불려 오지만, 그것들은 이전과 같은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반복과 회귀, 하지만 그것은 오늘날 미술 담론장에 놓이며 이전과 같은 것으로 감각되지 못한다. 미술사적 요소를 회화의 층 사이사이에 끼워 넣는 김호재의 방법론에서 발생하는 기이함을 생각한다.
김호재의 그림에서 반복은 미술사적 차용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같은 시기에 그린 연작들 사이에서도 도상과 구도가 반복되며 특유의 감각을 자아낸다. 특히 이번 연작에서는 무인도라는 테마가 바탕에 깔려있다. 눈부신 노란빛의 바탕에 실루엣만 드러나는 야자수, 무인도에 홀로 남은 인간, 댕강 잘린 것처럼 보이는 두상이나 영화 〈 CASTAWAY 〉에 등장하는 배구공 친구 윌슨 등 같은 형상들이 여러 작업을 가로질러 등장한다. 무인도를 연상시키는 형상들은 하나의 화면 내부에서도 화면 바깥의 다른 그림과도 이리저리 연결되면서 윌슨이 나오는 〈 CASTAWAY 〉뿐만 아니라, 로빈슨 크루소나 걸리버 같은 고전의 모티브를 연상시키기도 하고, 〈 Slippery when Wet 〉같은 그림은 무인도로 알고 있었던 섬이 관광지의 한쪽 구석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이야기가 나오는 영화 〈슬픔의 삼각형〉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여러 그림을 관통하는 무인도 테마는 특정한 하나의 이야기로 수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복 속에서 각기 다른 알레고리로 흩어진다. 영화나 소설을 떠올리게 하는 전형적인 무인도의 형상, 토르소나 물고기 인간 같은 신화와 미술사의 도상 등 각각의 이미지들은 반복 속에서 서로 이상하게 연결되며 기존의 상징과 다른 방향으로 번져나간다. 작가는 무인도라는 고립된 공간과 그곳에 머무는 한 명의 인간에게 예술가의 모습을 투영하지만, 관객들은 그곳에서 자기 자신, 혹은 자신의 위치에서 감각되는 또 다른 것들을 발견할 것이다.
이러한 반복과 회귀는 도상의 차원에만 머물지도 않는다. 그림의 표면에서 시각적으로 포착되는 형상은 그 아래층에 존재하는 미디엄의 부피, 그것을 바른 붓질의 움직임, 전사된 이미지의 물질성 같은 것들과 겹쳐지면서 바탕과 형상의 어긋남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 Slippery when Wet 〉을 보면 그림의 상단에는 의미심장하게 같은 형태로 반복되는 의자와 야자수가 나열되고, 가장 하단에는 한 명의 사람이 튜브를 몸에 낀 채로 지반 위에 서 있다. 그리고, 넓게 펼쳐진 중간 부분에는 위아래 형상이 그려진 유채 물감이 아예 묻어있지 않은 공간이 펼쳐진다. 물감과 다른 질감의 미디엄이 가장 겉면에 드러난다. 중단과 상단을 연결하는 부분의 작은 그리드는 수영장 타일을 재현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 아래 펼쳐진 넓은 면적의 그리드는 무언가 환영을 불러일으키기보단 물질 그 자체로 존재하고 있다. 그렇게 다른 층의 다른 물질성은 하나의 그림에 작동하는 전혀 다른 질서들을 보여준다. 이번 연작에서 전반적으로 눈에 띄는 격자 무늬는 기하학적인 그물로 이미지 속 세계에 질서를 구성할 것 같지만, 덕지덕지 바른 물감과 그 표면을 긁어 만들어진 격자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예를 들어, 많은 그림에서 바다로 그려지는 영역의 수면에 그리드가 펼쳐진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회화적 질감과 함께 일렁이면서 객관적으로 구조화되는 체계보다는 유동적으로 변화하는 상태를 나타내는 것처럼 보인다. 위에서 언급한 코멘수라티오와 같이 세계를 기하학적으로 구조화하기 위한 형식으로서의 그리드는 여기에서 정반대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사이 공간(inbetween space)이라는 문제를 사유하면서 연옥에 대해 자주 언급한다. 연옥은 지옥도 천국도 아닌 사이의 공간이다. 기독교 세계관에서 연옥은 천국으로 가기 위해 현세의 죗값을 치르며 머무는 곳으로 여겨진다. 연옥(Purgatorium)은 라틴어로 ‘정화하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purgo’와 장소를 뜻하는 접미사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낱말이다. 이러한 개념은 1274년 제2차 리옹 공의회에서 공식 교리로 채택되었으니, 기독교 초기부터 명확하게 존재하는 개념은 아니었다. 연옥이라는 개념이 체계화될 즈음부터 카톨릭은 돈을 내면 현세의 죄를 탕감해 주는 면죄부를 본격적으로 팔아치웠다. 실제로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신학적 담론을 통해서 만들어진 연옥은 사람들이 믿기 때문에 존재하는 공간이 된다. 그곳이 정말로 존재하는지 누구도 알 수 없지만, 오직 그런 곳이 정말로 있을 수도 있다는 믿음만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평생을 무신론자로 살던 사람들도 죽음을 앞두고는 지옥이나 연옥 같은 내세가 있을 수 있다는 두려움에 회심하곤 한다. 연옥이라는 픽션이 진정 작동할 수 있는 까닭은 우리가 내세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여러 그림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배구공 윌슨은 〈 CASTAWAY 〉라는 영화에서도, 김호재의 이번 연작에서도 육화된 형태의 자아로 나타난다. 〈 I am Wilson 〉에선 아예 자화상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극 중에서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돌아보면 흥미로운 점이 있다. 톰 행크스가 연기한 주인공은 무인도에 함께 떨어진 화물 더미에서 발견한 배구공을 손에 피가 묻은 상태로 만졌다가 그것에서 얼굴의 형상을 발견한다. 피로 그려진 손바닥 자국 혹은 추상적인 흔적이 의심의 여지 없는 얼굴, 더 나아가 인격적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극 중에서 그는 유일한 말동무이자 주인공이 자아를 투사하는 존재이다. 서사에 이입하여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배구공이 떠내려갈 때 주요한 인물이 죽는 것과 같은 충격을 받게 된다. 피 묻은 배구공을 인격체로 받아들이라는 터무니없는 제안이 픽션의 구조에서는 의심의 여지 없이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사물과 이미지, 그리고 픽션의 역능에 대해 생각한다.
화면 위에 층층이 쌓인 물질들은 그것이 놓이는 담론의 질서나 믿음의 체계에 따라서 전혀 다른 존재가 된다. 주로 환영을 불러일으키는 재현적 형상일 때가 많지만, 맥락에 따라 상징이나 알레고리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서사를 이루기도 한다. 매체론이나 형식주의 담론장에 놓일 때는 또 특정한 질서로 물질들이 재배치된다. 그러다가도 그 모든 것은 단순한 물질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김호재는 하나의 화면에 다양한 질서로 작동하는 물질들을 특유의 방법론으로 쌓아 올리면서 이러한 문제를 탐구해 나간다. 표면에 드러나지 않은 것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반대로 조금이라도 그 흔적을 추적할 수 있기 때문에. 표층과 심층의 변증법이 복잡하게 발생한다. 층과 층 사이에서 형상들은 하나의 명료한 존재가 아니라, 모순되는 질서 사이에 놓인 변증법적 존재가 된다. 층과 층 사이를 가로지르고, 구멍 내고, 찢어버리는 물질들. 층과 층 사이에서 솟아오르는 이미지들.
전시제목김호재: CASTAWAY
전시기간2024.08.22(목) - 2024.09.22(일)
참여작가
김호재
관람시간10:00am - 07:00pm
휴관일없음
장르설치
관람료무료
장소가나아트 나인원 Gana Art Center (서울 용산구 한남대로 91 (한남동, 나인원 한남) 고메이 494 한남 103호 가나아트 나인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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