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왈츠 포 사일런스(Waltz for Silence)ㅡ나의 몸짓은 너의 침묵을 가리고ㅡ”
“최후의 인간, 최초의 동물”
최석원(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시각 예술의 다른 영역에는 바이오필리아(biophilia)가 있다. 바이오필리아는 사람이 다른 생물, 특히 살아 있는 자연 세계와 관계를 맺으려는 타고난 성향이다.”
-에드워드 윌슨(1929-2021), 『지구의 정복자』(2012) 중에서
허진이 최근 십여 년이 넘도록 천착해 온 이른바 동물 연작에는 인간과 인간이 만든 도구, 기계도 등장하지만 화면을 지배하는 소재는 단연 동물이다. 1990년대에 삼십 대의 허진은 <다중인간>과 <익명인간> 연작 등을 통해 과거와 현재, 자연과 문명이 혼성된 시공간을 배경으로 분열적이고 몰개성적이 되어 가는 현대인의 초상을 그려 냈다. 그는 90년대 말의 <익명인간> 연작에서부터 식물, 산수 등과 함께 자연을 상징하는 소재로 동물을 그려 넣기 시작하여, 2000년대 중반부터는 야생 동물을 화폭 전면에 내세운 <유목동물>과 <이종융합동물> 연작을 작업의 주축으로 삼아 왔다. 허진의 관심사는 인간에서 동물로 진화한 셈이다.
허진이 그리는 동물은 현대인에게 낯설다. 그는 사자, 기린, 하마, 산양, 얼룩말, 코뿔소와 같은 열대 초원이나 삼림에 서식하는 야생 동물을 그린다. 현대인이 접하는 동물은 기껏해야 인간의 울타리에 가둬 놓고 키우는 반려동물이나 공장식 축산으로 사육되어 식탁에 오르는 육류뿐이다. 허진은 비윤리적으로 포획되어 동물원에 전시되지 않는다면 자신을 비롯한 현대 도시인이 좀처럼 보기 힘든 자연 속 동물을 그린다. 자연에는 실재하나 인간 세계에 부재하는 야생 동물을 그리는 허진의 작업은, 단어 ‘그리다’의 다의(多義)를 구현하듯, 동물을 ‘재현’하고 동시에 ‘상상’하는 일이다. 그는 멀고 먼 야생의 자연이 현대인의 눈앞에 현전(現前)하게끔 하기 위해 동물을 그리고 또 그린다.
<유목동물> 연작에서 동물, 도구와 기계, 인간은 무작위로 화면에 배치되지만, 크기, 색상, 표현법은 소재에 따라 별도의 정해진 형식이 있다. 형태의 묘사는 실재하는 대상을 따르지만 채색은 실제 모습에 구애되지 않는다. 허진은 우선 먹칠한 한지 바탕 위에 갈색, 녹색, 청색 위주의 붓질을 거듭하여 몇 종류의 야생 동물을 큼직하게 묘사한다. 동물의 몸 전면은 은색 펜의 날카롭고 반짝이는 선으로 촘촘히 채운다. 동물은 이처럼 큰 비중과 이질적 질감으로 돋보이게 그려져 작품의 중심 소재가 된다. 이어서 동물의 색보다 채도가 높은 색으로 신발, 헤드폰, 자동차, 비행기 등 문명의 이기를 그려 넣는다.
허진은 인간을 동물, 기계와 사뭇 다르게 표현한다. 윤곽만 드러내는 실루엣 기법으로 인간의 형상을 그리는데, 먼저 그려진 동물, 기계 등과 중첩되는 부분은 노란색으로 칠하고, 배경 위에 배치되는 부분은 바탕의 먹색이 드러나게 둔다. 세부 묘사 없이 노랗고 검은 면이 교차되는 방식으로 단순하게 표현된 인간은 직립 보행을 하는 존재임이 확인될 뿐, 개별성이 드러나지 않는 ‘익명 인간’으로 표현된다. <이종융합동물> 연작의 경우 서로 다른 종의 동물들이 한 몸을 이루어 등장하고, 배경 곳곳에 작은 바위섬이 그려지는 정도의 변주만 있을 뿐 <유목동물> 연작과 형식적으로 같은 계열의 작품이다. 한편 모든 작품의 여백은 단색으로 칠한 뒤에 밝고 연한 색조의 점묘로 채우는데, 그 결과 동물 연작은 망점이 있는 인쇄물 위에 동물, 기계, 인간의 콜라주가 올려진 듯한 허진 특유의 화면으로 완성된다
<유목동물+인간-문명>과 <이종융합동물+유토피아>, 동물 연작의 전체 제목이다. 허진은 동물로 표상되는 야생의 자연과 기계로 상징되는 물질문명의 두 세계 그리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인간에 대해서 사유하는 화가이다. 작품의 명목과 실제에서 공히 동물이 중심인 만큼 허진은 생태주의자로 평가될 법하고, 그렇다면 그림 속 인간의 도구와 기계는 동물과 대립되는 문명 비판적 소재로 해석될 만하다. 그런데 동물과 기계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조형되기는 하지만, 양자의 의미와 가치가 대척된다고 판단할 만한 시각적 근거는 딱히 없다. 허진은 현대인의 삶에서 괴리된 자연과 현대의 일상을 지배하는 문명을 병치하여 보여 주되, 자연과 문명을 이분법적으로 사고하거나 양자 간의 관계에 대해서 해답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이토록 거시적인 문제에 관한 한 판단과 선택은 특정 개인이 아니라 인간 집단의 몫이어야 한다. 그림으로 다시 눈을 돌리면 동물과 기계 사이사이에 실루엣만으로 표현된 인간은 명시성이 높은 노랑과 검정의 배색 때문에 마치 경각심을 제고하는 표지판처럼 보인다. 호모 사피엔스로 불릴 정도로 현명하지도 않고, 신이 창조했다고 믿을 만큼 특별하지도 않은, 척추동물문 포유강 영장목 사람과에 속하는 인간에게 허진은 동물 연작으로 질문을 던진다. 사라져 가는 자연과 지속 가능해 보이지 않는 문명의 이중 위기 속에서, 폴 고갱도 물었듯,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수만 년 전 구석기 시대의 동굴 벽화가 보여 주듯 인류가 최초로 재현한 대상은 동물이다. 허진의 동물 연작을 오롯이 감상하기 위해서는 다시 고갱의 질문으로 돌아가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우리가 무엇인지부터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역사적으로 인간은 생존과 생업, 주술과 종교, 부와 권력, 전쟁과 지배, 놀이와 여가, 과학과 의학 등 거의 모든 종류의 욕망을 동물에 투사해 왔다. 그 과정에서 동물을 그리고, 동물 그림을 감상하는 행위는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주요 수단 중 하나였고, 때로는 재현된 동물의 효과가 실재하는 동물의 효용을 압도하기도 했다. 동물이 그저 귀엽고, 신기하고, 무서워 보이기만 하는 현대인이라면, 그래서 허진의 동물 연작이 영 낯설어 보인다면 미술사와 인류사를 되짚어 보라. 허진이 제목에 붙인 ‘유목’에서 질 들뢰즈의 노마디즘까지 읽어 내려는 수고로움 대신에, 그의 동물 연작을 인간 종족이 정주하기 훨씬 이전에, 인류세는 말할 것도 없고 홀로세 이전에 그렸던 동굴 벽화와 나란히 놓고 보라.
허진의 동물 연작은 인류 최초의 그림과 적잖이 닮았다. 구석기인과 허진의 그림에서는 모두 무한정의 공간을 누비는 야생 동물이 주인공이며, 인간은 개체가 아니라 집단으로서 동물과 관계를 맺는 조연일 뿐이다. 허진은 동물의 몸에 은빛 선을 긋고 또 그어 빛나게 하며, 점안(點眼)하여 생명을 불어넣는다. 그림에도 반영되었듯이 기술의 축적에 따라 인간이 쓰는 기구는 복잡해지고 거대해졌지만, <유목동물+인간-문명>, 즉 동물과 인간을 합한 뒤에 문명을 빼 보자는 작가의 수식을 따르자면, 결국 남는 것은 자연의 동물과 맨몸의 인간이다. 동물과 인간이 공생했던 원시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허진의 동물 연작은 문명 시대를 거치며 인간이 동물에 투사하고 부과해 온 욕망을 거두어 보자고 제안한다. 그림의 기원을 탐구하여 시원적 그림을 남기고 싶은 화가의 욕망만은 그대로 남겨둔 채 말이다.
전시제목허진: 왈츠 포 사일런스 "Waltz for Silence" ㅡ나의 몸짓은 너의 침묵을 가리고ㅡ
전시기간2023.09.21(목) - 2023.10.14(토)
참여작가
허진
초대일시2023년 09월 21일 목요일 17:00pm
관람시간11:00am - 06:00pm
휴관일일요일, 추석 연휴 휴관
장르회화
관람료무료
장소아트레온 갤러리 Artreon Gallery (서울 서대문구 신촌로 129 (창천동, 아트레온) 창천동, B1F, B2F)
연락처02-364-8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