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주의

서양미술사 l 19C 근대미술

눈에 보이는 대로 세상을 담다.

19세기를 미술을 대표하는 인상주의. 빛의 움직임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세계를 묘사했던 인상파화가들.
현대회화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상파. 그 화풍의 파격적인 변화를 살펴보자.

  • 인상 해돋이

    클로드 모네, 캔버스에 유채, 1873년, 마르모탕 모네 박물관, 파리

  • 물랭 드 라 걀레트

    르누아르, 캔버스에 유채, 131×175㎝, 1876년, 오르세미술관

  • 그랑드자트섬의 일요일 오후

    조르주 피에르 쇠라, 캔버스에 유채, 207.5 x 308cm, 1885년,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 별이 빛나는 밤에

    빈센트 반 고흐, 캔버스에 유채, 73.7x92.1cm, 1889년, 뉴욕 현대미술관

  • 소나무사이로 보이는 생트빅투아르산

    폴 세잔, 캔버스에 유채, 73×91cm, 1882년, 미국 필라델피아미술관

  • 해변가의 타히티 여인들

    폴 고갱, 캔버스에 유채, 69x91.5cm, 1891년, 오르세미술관

Description

19C 말 파리에는 프랑스의 공식 미술교육 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에콜 데 보자르(Ecole des Beaux-Arts)가 있었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등장하는 시기에 에콜 데 보자르에서 교육을 담당한 유명 교수는 모두 전통적이고 고전적인 화풍을 고수한 이들이었다. 에콜 데 보자르의 학생들은 일반적으로 살롱적을 통해 데뷔했는데 매우 편파적인 심사가 이루어졌고 낙선자들의 반발을 우려해 낙선전이 개최되었다. 

 

1874년 살롱전에 출품했지만 별 반응을 얻지 못한 드가와 낙선전에 작품을 걸어야 했던 시슬레, 피사로, 모리조, 르누아르, 모네 등이 모여서 자신들만의 독립적인 전시회를 개최하게 된다. 이 전시회의 정식 명칭은 '무명의 화가, 조각가 및 판화가 협회 제 1회전 이었고 후대에 와서 제1회 인상주의 전시회라고 명명된다.

 

 

인상주의 용어의 탄생

모네의 <해돋이>작품이 제1회 인상파 전람회에 출품이 되었을 때, 풍경화가의 대가인 조셉 뱅상이 이 작품 앞에 서있는 미술전문 기자인 루이 르루아에게 이 작품이 도대체 무엇을 표현한 것이냐고 물었다고 한다. 기자는 '그림이 덜 그려졌다'며 조롱을 섞어 인용한 것에서 인상주의라는 용어가 유래되었다. 

 

인상주의미술은 공상적인 표현기법을 포함한 모든 전통적인 회화기법을 거부하고 색채·색조·질감 자체에 관심을 둔다. 인상주의를 추구한 화가들을 인상파라고 하는데, 이들은 빛과 함께 시시각각으로 움직이는 색채의 변화 속에서 자연을 묘사하고, 색채나 색조의 순간적 효과를 이용하여 눈에 보이는 세계를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기록하려 하였다. 대표적인 인상파 화가로는 모네·마네·피사로·르누아르·드가·세잔·고갱·고흐 등을 들 수 있다.

 


인상파의 시작

대상을 어디까지나 눈에 보이는 대로 재현하려는 운동이 일부 청년작가들 사이에 일어나 옥외로 나가서 태양의 직사광선 아래 진동하는 자연의 순간적 양상을 묘사하는 일이 시도되었다. 그들에게 자연은 종래의 화가들이 나타낸 것처럼 그렇게 어두운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지극히 유동적이고 변화무쌍한 것으로 비춰졌다. 빛의 변화에 따라 같은 풍경이라도 전혀 양상을 달리하고 그 속에 포함된 대기의 뉘앙스의 미묘함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이와 같이 빛의 문제, 밝음의 추구에서 색채의 문제에 이른 그들은 변하기 쉬운 자연의 순간적 표정의 파악을 위하여 여러 가지 표현상의 새로운 기법을 발견하는 동시에 그 제작 태도에 있어서는 필연적으로 자기들의 직관(直觀)을 중시하고, 당초에 지향했던 대상의 객관적 재현의 범위를 벗어나 주관적인 감각의 반영에 전념하게 되었다. 이런 특징을 지닌 인상주의 미술은 시간이 지나면서 신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로 나아가게 된다.

 

 

점으로 색채를 조합하는 신인상주의미술

신인상주의자들은 색채를 원색으로 환원하여 무수한 점으로 화면을 구성함으로써 통일성을 유지하였다. 즉, 그림물감을 팔레트나 캔버스 위에서 혼합하지 않고 망막(網膜) 위의 시각혼합으로 필요한 색채를 얻는 방법이다. 예를 들면, 청색과 황색의 작은 점들을 수없이 배열해나가면 시각적으로는 녹색으로 보이는 따위이다. 또한 형태나 구도에서는 ‘황금분할(黃金分割)’ 등을 자주 사용함으로써 고전적인 회화에서처럼 안정성을 찾으려 하였다. 

 

점으로 이루어진 그림을 선보인 신인상주의자들은 인상주의자들에 대한 반발로 고전주의적인 정신의 부활을 꾀하고자 하는 의미에서 시작되었다. 인상주의를 더욱 과학적으로 세밀화 시킨 것으로 쇠라, 시냐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그림의 면을 점으로 표현한 것을 말한다. 이렇게 얻어진 색은 색의 순도를 그대로 유지하고 망막을 통해 중간색이 형성되는 효과를 얻게 된다. 

 

이 말이 생기게 된 계기는 1884년 열린 앵데팡당 전시회에 출품한 쇠라의 “목욕하는 사람들”이라는 작품을 비평가 펠릭스 페네옹이 보고 붙였다고 한다. 이 전시에서 쇠라는 시냐크를 만나게 되고 전시회 이름을 따 “앵데팡당 미술가 협회”라는 그룹을 만들었다. 점묘법으로 그림을 그리는 신인상주의화가들은 한 작품을 완성하는데 1~2년 정도의 시간이 걸렸고, 눈의 피로로 시력이 손상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후기 인상주의의 특징

후기인상주의는 인상파에 속하거나 또는 그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차츰 그 영향에서 벗어나 개성적인 방향을 모색함으로써 내부에서 인상주의를 수정하려고 한 사람들의 경향을 가리킨다. 말하자면, 후기 인상주의는 인상주의와 ‘시대정신’을 공유하고 있었지만, 그 미학적 전략은 인상주의와의 단절에 있었다고 보는 편이 옳다. 그러므로 물체의 실재감과 공간구성을 추구한 세잔, 강렬한 색과 붓끝으로 내적 생명을 표출한 고흐, 또는 원시성과 신비감을 원색(原色)을 종합적으로 사용하여 상징적 색채로 나타내려 한 고갱의 작풍은 어디까지나 개별적이고 집단으로서의 공통성은 없었다. 

 

후기인상주의 화가들은 서로 긴밀하고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던 인상주의 화가들과는 달리 주로 혼자서 그림을 그렸다. 이 시기는 인상파 이후의 20세기 회화의 발전을 준비한 다채롭고 중요한 한 단계로 보아야 할 것이다. 후기인상주의는 자연주의적인 표현방식에서 벗어나 20세기초의 2가지 주요미술운동, 즉 색채와 선을 통하여 감흥을 불러일으키려한 야수파와 입체파로 나아갔다. 

 


후기인상주의의 발생과 영향

1910년 평론가 로저프라이가 런던의 그래프론 화랑에서 기획한 “마네와 후기 인상주의자전”이란 표제에서 유래되었고, 일반적으로 1886년대에는 급속한 산업과 과학의 발달이 초래한 실증주의와 물질문화를 회의를 느끼는 시대정신이 바탕이 된다고 하겠다. 따라서 분석적 자연과학의 정신을 대신하여 종합적이고 인본적인 경향이 대두하게 되는데 외부의 현상보다는 내면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즉 공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시도가 이루어졌다. 

 

앞서 이야기한 후기인상주의자들은 모두 인상주의에 참여했던 사람들이었다. 세잔은 물체의 실제감과 고전적 작품의 견고함을 모두 담을 수 있는 화면구성을 추구하였고 그리하여 입체주의로의 길을 열게 된다. 또한 반 고흐는 정열적인 감정표현으로 표현주의자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게 되고, 폴 고갱도 상징주의적 색채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야수주의로의 통로를 제공했다고 하겠다. 

 

 

뮤움 미술사연구팀 김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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