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관 초대展

2022.08.31 ▶ 2022.09.24

장은선갤러리

서울 종로구 율곡로6길 13-3 (운니동, 노블호텔)

Map
  • 김진관

    빛을 품은 사과3 53.5 X 46cm, 장지.광목에 채색, 2022

  • 김진관

    앉은자리 33 X 24cm, 장지에 목탄, 2022

  • 김진관

    나의 터 62 X 46cm, 켄버스에 목탄, 2022

  • 김진관

    線1 169 X 115cm, 한지에 목탄, 2022

  • 김진관

    線5 66 X 66cm, 장지에 목탄, 2022

  • 김진관

    線6 85 X 57cm, 장지에 목탄, 2022

  • 김진관

    빛을 품은 사과 53 X 45.5cm. 장지 광목에 채색. 2021

Press Release

성신여대 명예교수인 김진관 선생님은 스쳐가는 모든 자연의 본질을 관찰하며, 자연이 가진 강한 기운을 탄화된 목탄이라는 자연재료를 통해 자연의 실존적 형상을 표현해내고 있는 한국화가이다. 장지에 공감각적인 자연을 담아냄으로써 자연의 본질을 살피는 동양화를 현대적 이미지로 계승하고 있다.

"자연을 실존적 대상으로 보고 싶다"는 작가의 작업노트에서, 자연을 바라보는 작가의 세계가 보인다. 그의 세계는 우리 주변의 작고 보잘것없는 자연, 너무도 당연하게 있었기 때문에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우리네 자연이며, 우리의 삶과 정서를 품고 키워낸 세상이다. 이처럼 우리에게 공기처럼 익숙한 미감을 군더더기 없이 표현하려는 태도가 진솔한 느낌의 그림으로 태어나며. 이런 것을 작가는 볼품없다고 여겨왔던 사소한 자연 속에 담아 보여주고 있다.

장지에 거칠고 투박하게 함축된 선의 방향감과 속도감은 선이 표현해낸 또 다른 자연의 생동감이다. 자연의 아름다움은 영원하나, 동시에 일시적이기에 작가의 시선이 닿은 작은 미물로부터 모든 만물까지 작가의 화폭에서 자연을 압화한 듯 움직이고 있다.

사유의 시선이 닿아 선으로 탄생한 자연의 새로운 세계,
2010년 장은선갤러리초대전 이후 만 12년만에 두 번째 전시로 김진관 선생님의 작품 40여점이 마지막 여름볕과 결실의 만물이 가득한 9월에 새롭게 선보인다.

김진관 선생님는 중앙대학교 동대학원을 졸업. 현재 정년퇴임 후에도 성신여대 동양학과 명예교수로 재직중이며, 예술의 전당 개관전,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전을 비롯한 23회의 개인전과과 기타 다양한 단체전 등 약 60회에 달하는 전시에 참여하며 활발한 작가활동을 하고 있다.
■ 장은선갤러리


김진관의 회화
맑고 투명한, 여리고 소소한 그림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김진관의 그림은 정적이다. 그런데, 정적인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수런수런 소리가 들린다. 풀잎 사이로 부는 바람소리며, 풀섶에 숨은 여치 우는 소리, 흙 알갱이를 밀쳐내며 개미가 떼 지어 지나가는 소리, 콩깍지가 터지면서 콩들이 흩어지고 부닥치는 소리. 그런데, 정작 그림에서 소리가 날 리가 없다. 그만큼 암시적이고 생생하다. 생생한 그림이 소리를 암시하는 것.
그런데, 생생한 것으로 치자면 자연도감 만한 것이 없다. 그런데, 정작 자연도감에선 소리가 나지 않는다. 그 실체가 손에 잡힐 듯 생생하고 실체 그대로를 옮겨 놓은 듯 사실적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가 않는다. 소리가 나려면 소리가 지나가는 길이 있어야 하는데, 조직이 지나치게 치밀한 그림, 불투명한 막으로 덮씌워진 그림이 그 길을 막아버린 것이다. 극사실적인 그림이 오히려 비현실적이고 초현실적으로 와 닿는 이유이며, 박제화 된 그림이 현실의 형해며 표본을 떠올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소리가 지나가는 길이며 바람이 흐르는 통로를 만들기 위해선 그림의 조직이 상대적으로 느슨하고 헐렁해야 하고, 맑고 투명해서 그 깊이며 층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림 속에 공기를 머금은 깊이를 조성하고, 공기와 공기 사이에 층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공기와 공기 사이에 층(차이)을 만들어야 비로소 그렇게 달라진 밀도감을 통로 삼아 공기가 흐를 수 있게 된다.

작가의 그림은 맑고 투명하다. 그리고 사실적이지만, 의외로 극사실적이지는 않다. 여백의 경우에 거의 담채를 떠올리게 할 만큼 묽은 채색을 여러 번 중첩시켜 맑고 투명한 깊이를 조성한다(근작에선 아예 종이 그대로를 여백으로 대신하기도 한다). 그리고 모티브를 보면 의외로 한 번에 그려 미세한 붓 자국이며 물 얼룩과 색 얼룩이 여실하다. 미세 얼룩이 오히려 암시력을 증가하는 것인데, 이처럼 암시에 의해 보충되지 않으면 실제감은 어려워진다. 실제와 실제감은 다르고, 실제가 실제감을 보증해주지는 못한다. 그림은 결국 감이며, 실제가 아닌 실제감의 문제이다. 마찬가지로 그리는 것보다는 그리지 않는 것, 그리지 않음으로써 그리는 것을 암시하는 것, 채우는 것보다는 비우는 것, 비움으로써 채워진 상태를 암시하는 것이 더 어려운 법이고, 그 만큼 결정적이다. 이 모두가 그저 수사적 표현이 아닌, 암시력을 증대시키기 위한 실질적인 방법이며, 그림 속에 암시공간을 조성하기 위한 실질적인 계기이다.

그림은 결국 조직의 문제이다. 조직을 촘촘하게 짤 것인가, 아니면 느슨하게 짤 것인가. 느슨하게 짜야 비로소 공기가 흐르는 길이 열리고, 바람이 지나가는 통로가 열린다. 그리고 작가가 소지로 쓰는 한지는 그 조직이 느슨해서 이런 공기의 길이며 바람의 통로를 내는 데는 그만이다. 섬유조직이 허술한 탓에 오히려 통풍성이 뛰어나고 덩달아 암시적인 그림에 어울린다는 말이다. 여기에 작가는 엷은 채색을 여러 번 덧 올려 바른 중첩된 색층으로 하여금 이렇듯 느슨한 조직 사이로 충분히 스며들게 하고 깊이감이 우러나게 한 것이다. 종이와 채색이 일체를 이룬 나머지 마치 종이 자체에서 배어난 것 같은, 종이 속에서 밀어올린 것 같은 색층이며 색감의 느낌을 주는 것. 그리고 종이는 채색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소리마저도 이렇듯 뱉어낼 것이다.
나아가 사실주의도 여러 질이다. 즉물적인 사실주의가 있고 암시적인 사실주의가 있다. 즉물적인 사실주의는 자연과학의 인문학적 전망과 관련이 깊고, 암시적인 사실주의는 감각적 경험이며 예술의 특수성에 관련이 깊다. 문제는 자연현상에 대한 물적 증거와 표상형식이 아니라, 어떻게 자연현상을 감각적으로 추체험하고 자기 경험으로 거머쥘 수 있느냐는 것이며, 그 경험을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여백은 이런 암시적 사실주의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여백에도 여러 질이 있다. 그저 텅 빈 공간이 있고, 오히려 꽉 차 있는 텅 빔 곧 충만한 텅 빔이라는 모순율의 경우가 있다. 비어있어야 담을 수가 있고 찰 수가 있다. 바로 관객에게 할애된 몫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매번 똑같은 것을 담지 않는다. 상황논리에 따라서, 저마다 다른 것을 담고 매번 다른 것으로 채운다. 의미를 결정적으로 세팅하지 않는 것, 의미를 붙박이로 붙잡아두지 않는 것, 의미의 망을 느슨하게 짜 헐렁한 망 사이로 설익은 의미들이 들락거리게 하는 것, 그려진 의미가 미처 그려지지 않은 의미를 불러오게 하는 것이 모두 여백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작가의 그림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작가는 말하자면 자연을 그리고 생명을 그리고 생태를 그리지만, 그것도 꽤나 세세하게 그려내지만, 정작 이를 통해서 자연이며 생명이며 생태의 의미를 결정화하지는 않는다. 자연을 어떤 결정적인 의미며 정의로 한정하지도 환원하지도 않는다. 정작 중요한 것은 계몽주의가 아닌, 자연을 매개로 한 경험이며 추체험임을 알기 때문이다. 해서, 그저 그림과 더불어 바람결을 느낄 수만 있다면, 공기의 질감을 감촉할 수만 있다면, 그리고 그렇게 경험된 것을 추체험으로 분유할 수만 있다면 그 뿐이다. 소박할 수도 있겠고, 그 만큼 결정적인 경우로 볼 수도 있겠다.

그림 속에 공기의 길이며 바람의 통로를 내는 일, 헐렁하면서도 결정적인 감각으로 자연의 숨결을 암시하는 일, 그래서 마치 내가 그 숨결과 더불어 호흡하고 있다는 착각 속에 빠지는 일은 소박함이 아니고선 이를 수도 이룰 수도 없다. 여기서 소박함이란 무슨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태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것은 대상의 물적 형식 외의 영역과 범주에 할애된 몫이며(대상을 느슨하게 잡는다? 대상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그 몫이 잘 표현돼야 비로소 대상의 물적 형식 자체도 더 잘 드러나 보일 수가 있게 된다. 모든 존재는 관계의 망에 속해져 있다. 문제는 모티브 자체가 아닌, 모티브와 여백과의 상호작용이며 상호간섭이다. 모티브도 존재고 여백도 존재다. 여백은 더 이상 여백이 아니다. 공기며 바람이다. 공기가 지나가는 길이며 바람이 흐르는 통로다. 그 실체감이 희박한 존재(여백)를 포착해야 비로소 상대적으로 실체감이 또렷한 존재(모티브)도 포획할 수가 있게 된다.

다시, 소리로 돌아가 보자. 어떤 사람은 봄에 밭에다 귀를 대고 있으면 새싹이 움트는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대단한 귀를 가졌다고도 생각되지만, 그저 귀의 문제라기보다는 예민한 감수성의 문제로 보인다. 작가의 그림에서 들려오는 소리도 알고 보면 그림은 고사하고 실제 자체도 여간해서 그 소리를 들어보기는 어려운 것들이다. 둔감한 감수성에는 거의 불가능한 경우로 봐도 될 것이다. 결국 관건은 실제로 소리가 들리는지 유무보다는 감수성의 문제이다. 자연을 대하는 주체의 감수성과 태도의 문제이다. 그리고 감수성과 태도에 관한 한 작가가 들을 수 있는 소리를 우리도 들을 수가 있게 된다. 여하튼 이처럼 실체감이 희박한 것들이 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으려면 느릿느릿 걸어야 한다. 발터 벤야민의 산책자처럼 할 일없이 걸어야 하고, 칸트의 무목적적 만족에서처럼 목적의식을 내려놓고 걸어야 하고, 장자의 소요유에서처럼 개념 없이 걸어야 한다. 소리통이 잡소리로 가득 차 있으면 다른 소리가 들려올 공간이 없고 틈이 없다. 더욱이 이처럼 여린 것들이 내는 소리라면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작가의 투명하고 맑은 그림은 이처럼 소소하고 여린 것들이 내는 소리로 소란스럽다.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나도 언젠간 작은 씨앗이 움트면서 내는 소리를, 실체감이 희박한 것들이 실체감이 또렷한 것들을 밀어 올리면서 내는 소리를, 그 여리면서 치열한 소리를 들을 수가 있을 것이다.

전시제목김진관 초대展

전시기간2022.08.31(수) - 2022.09.24(토)

참여작가 김진관

관람시간11:00am - 06:00pm

휴관일일요일 휴관

장르회화

관람료무료

장소장은선갤러리 Jang Eun Sun Gallery (서울 종로구 율곡로6길 13-3 (운니동, 노블호텔) )

연락처02-730-3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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