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Tact 온-택트

2021.01.13 ▶ 2021.02.21

공근혜갤러리

서울 종로구 삼청동 157-78

Map
  • 전시포스터

  • 박진희

    Bathroom moss 125 x 160 cm, brick on wood, spray, mixed media, 2019 ⓒ 박진희. 사진제공 공근혜갤러리

  • 박진희

    Marsh garden oil on canvas, 230 x 170 cm , 2020 ⓒ 박진희. 사진제공 공근혜갤러리

  • 박진희

    Across marsh oil on canvas, 291 x 218 cm, 2020 ⓒ 박진희. 사진제공 공근혜갤러리

  • 김태연

    흑우-심해 한지에 채색, 200x270cm, 2020 ⓒ김태연. 사진제공 공근혜갤러리

Press Release

온-택트: 모바일 네트워크의 습지로부터
남웅 |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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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8일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마스크를 의무화하는 국가 방침에 부정적인 뉘앙스의 글을 남겼고, 곧장 공론장에 회자된 바 있다. 1) 그의 문장을 따르면 얼굴은 자신을 작동시키고 자신을 드러내는 매개이다. 그것은 열림이자 노출이며 타인에게 자신을 전시하고 소통한다. 정치의 장소로서 얼굴은 서로를 승인하고 세계와의 거리를 조율하며 부단한 열림의 기술을 표현하고 변형한다. 아감벤은 구성원의 얼굴을 마스크로 가리는 정책은 정치적 차원을 스스로 지워버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감각 가능한 기반을 잃고 얼굴 없는 이름을 향한 메시지만을 교환한다는 것이다.

염세적인 체념의 톤으로 마스크를 의무화하는 국가정책을 비판하는 아감벤의 논지가 전제하는 것은 얼굴의 대체불가능성이다. 한데 얼굴 접촉과 표현의 매개라는 주장은, 그의 논조와 달리 얼굴이 자신을 드러낼 뿐 아니라 가림과 변장을 통해서도 자신의 존재와 정치적 표명을 드러내기도 함을 암시한다. 이른바 얼굴은 존재의 절대적인 오브제 또는 ‘벌거벗은 생명’(bare life)이지만, 가변적이고 수사적이며 은폐와 포착 사이 소통의 기예를 적용하고 개발할 수 있는 기술적 장치인 일종의 복면이자 가면이다. 흥미롭게도 그는 얼굴로부터 이어지는 다른 존재적 양식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2016년 조선령은 아감벤으로부터 스페키에스적 존재를 다시 읽는다. 2) ‘거울 속의 이미지처럼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고 다른 어떤 기체 속에서만 나타날 수 있는 곁존재’로 풀이하는 라틴어 스페키에스(Species)로부터 그는 복면의 다른 정치적 가능성을, 마스크의 다른 용례를 살핀다. 차단하고 분리함으로써 얼굴을 감추는 것은 다시 감추고 존재를 숨기는 것 자체를 정치적인 표명으로 전유할 수 있다. 얼굴을 가리는 것은 물리적인 소통에 많은 제한이 따르지만, 동시에 다른 매개 장치를 통해 표현과 소통의 기술을 연마하면서 가리고 드러냄 자체를 정치적·미학적 기술의 효과로 확장할 수 있다. 장치에 대한 기예를 익히는 것은 소통과 스킨십에 대한 절충이겠지만, 무엇보다 감각적 신체와 얼굴의 연장으로서 장치들을 사유하고 세속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공근혜갤러리가 기획하는 전시 ‘온-택트’(On-tact)는 코로나19의 전지구적 전파로 비대면 접촉과 거리두기가 권고되고 때론 강제되는 동시대성을 공유한다. ‘접촉’을 의미하는 컨택트(contact)에 굳이 알파벳 C를 빼고 의미를 부여한 시도는 단순한 문자유희일 수 있겠지만, 접촉의 불완전성을 상기시키며 남은 단어조합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살피도록 한다.

온-택트는 접촉의 성질 이면에 접촉의 인프라와 기술의 차원을 조명함으로써 접촉을 기피하는 상황에 스킨십과 표현의 가능성을 찾는데 주안점을 둔다. 한편으로 접촉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직접적인 접촉일지라도 기술과 전략의 기예를 통해 매개되고 있음을 환기시킨다. 시각예술의 차원에서 온-택트를 강조하는 것은 감각적 표상을 기술적으로 구현하고 매개하는 이로서 예술가와 예술 형식에 조명을 비춘다는 취지가 있다. 코로나19의 특수한 상황이 아닐지라도 매개를 통해 감각적으로 감응하고 충돌하며 미적 형식을 구축하고 소통의 환경을 만들고 파괴하는 공정을 수행하는 주체를 예술가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들은 직접적인 접촉까지도 비평적으로 여과하고 거리를 확보해가며 그에 대한 비평적 해석을 내보인다. 갤러리는 접촉과 전략의 기예로서 온-택트의 작가들로 김태연과 박진희의 작업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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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 회로에 연결되어 있다. 외부로부터 몸을 향해 꽂는 직선들에 성긴 붓질로 그려낸 척추와 내장이 대비된다. 김태연의 화면은 가볍고 옅으며 유동적이다. 수많은 실선에 꼭두각시처럼 연결된 채 속을 드러낸 몸들은 동양의학의 해부도를 연상케 한다. 몸은 덩어리보다는 핏줄과 뼈대, 근섬유와 주름 등 선적 요소들로 구성되고 변용한다. 너울거리는 선들이 어디서 시작되고 누가 관장하는가를 알려주지 않지만 직선은 더러 예각의 사각 화면에 수렴하거나 바다의 물살로, 다른 사물들로 이어진다. 회로에 예속된 몸은 회로를 통해 몸을 재구성하고 이미 예속되어 있었음을 알리기라도 하듯 연결되어 있다.

직선에 연결된 신체형상을 통해 디지털 모바일에 연동하며 재구성되는 몸들의 네트워크를 떠올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지구 행성의 데이터 혈액이자 다른 모든 것들을 집어 삼키는 미디어로서 인터넷 3) 의 연결과 유동성을 시각화하는데 있어 작가는 동양화의 질료와 필법을 동원한다. 철선묘의 가는 선들과 다른 준법들이 사물을 만들고 몸을 구성하며 세계를 재배치한다. 바탕 질료로서 한지는 네트워크에 걸친 살갗의 존재라는 부박한 물성을 시각화한다. 필치의 역동은 화면의 두께보다 당대의 유동성에 집중한다. 형상은 구분되지만 경계가 분명치 않은 채색수묵화의 특성 또한 동시대 희박해지는 물성을 탐구하는 접점으로 활용된다. 그렇게 한지에 그려진 인물은 외부의 수많은 직선들에 핏줄과 모공이 연결된 타동적 인물, 갇히고 묶이고 잠식된 채 존재하는 이들의 모습을 취한다.

온라인 환경을 대상 삼아 그림 그리는 작가는 네트워크의 일원이기도 하다. 그는 게임 네트워크에서 플레이하는 자신의 활동을 작업 모티프로 삼는다. 여기에는 접속을 통해 복수의 참여자가 동시에 수행하는 게임과 게임 동료들이 주요 소재가 된다. 참여자들은 게임의 세계관을 공유하고 캐릭터와 동기화하면서 아이템을 구하거나 직접 구매하며 미션을 완수하고 레벨을 높인다. 소비와 상승의 욕망이 투영된 네트워크에서 플레이어는 게임을 함께 하는 동료들과 클랜과 길드, 혈맹 등의 관계를 이루며 게임 생태계를 구성한다.

그 속에서 플레이어는 동료들 간 소통하는 언어를 창안하고 구사한다. 이는 게임의 세계관과 캐릭터에 밀착하면서도 온전히 동일시하지만은 않는 주체로서 간격을 확보한다. 예의 밀착된 거리로부터 작가는 게임동료에게 자신이 작가임을 밝히며 그를 인터뷰하고 초상화의 산출물로 남긴다. <얼굴 없는 게이머> 시리즈에 그는 눈앞에 대상을 재현하는 기존 초상방식을 따르기보다 상대의 나이와 성별, 노동환경 등 정보 값과 목소리, 게임 캐릭터와 운영 스타일 등 주변적이고 간접적인 지표들을 통해 상대를 유추하며 피부의 질감을 입히고 옷과 소품들을 배치하는 간접과 우회의 재현적 기술을 동원한다. 촉각과 시각상의 제약을 일종의 게임 요소로 삼으며 타인의 실루엣을 그리는 셈인데, 여기서 실제 인물과 얼마나 유사한가는 판단의 중요한 척도가 아니다. 김태연의 ‘초상 몽타주’는 작가 스스로 인간적 감각체계와 다른 방식의 프로세스로 타인의 윤곽을 그리는 것이자 관계의 테두리를 다시 그려내는 수행에 가깝다. 네트워크의 기술적, 물리적 한계를 윤곽 짓는 작업은, 동시에 관계의 지층을 축적하고 새로운 관계의 경험을 만들어낸다. 이는 프랑스 출신 작가 소피 칼이 자신의 헤어진 남자친구가 메일로 전한 이별 메시지를 서로 다른 공간에서 상이한 직종의 여성들 107명에게 우편으로 보내어 그에 대한 반응과 답을 대신 하도록 했던 < Take care of >(2007)을 떠올리기도 하는데, 그로부터 13년이 지난 김태연의 작업은 비대면의 접촉을 공유하면서도 모바일 환경에 연동하며 매개된 동료와의 관계를 게임의 문법으로 비틀어 재가공하는 효과를 살피는 것이기도 하다.

<흑우시리즈>에 이르면 작업은 도상해석학과 슬랭의 혼종을 만나게 된다. 흑우로부터 누군가는 샤머니즘적 접근을 하거나 심우도(尋牛圖)를 떠올리며 네트워크에 연결된 몸을 수행과 깨달음으로 연결시킬 수 있다. 일테면 검은 소를 두고 온라인 네트워크와 오프라인을 연결하며 몸과 세계의 연안을 거니는 표상으로 읽어낼지 모른다. 한편 흑우는 ‘호구’의 또 다른 방언으로 쓰인다. 가상의 레벨과 상품에 마음을 뺏겨 가산을 탕진하고 낭비하는 이들을 이르는 말로도 쓰이는 흑우는, 열패의 정조를 자조적인 말장난과 놀림의 수사로 변용한 개념이기도 하다. 화면 위에 얇게 번지는 물감층으로 부박해진 몸의 다른 편에는 아이템을 향한 절박한 욕망이 배치된다. 아이템을 획득하기 어려운 ‘흑우’들에게 현질은 매혹적인 상품이 되고 탐욕적으로 소유하기 쉬운 방식이다. 게임에 혼을 빼앗기고 재산을 탕진하는 과정 속에 몸이 연동되고 관계가 예속된다. 그렇다면 무빙이미지 알고리즘의 연쇄이자 몸의 신경회로를 침투하고 재배치하는 게임으로부터 파생하는 호구의 존재론을 흑우의 샤머니즘적 해석에 연결 짓지 못할 이유도 없지 않을까. 0과 1로 수렴하는 디지털 이진법은 부재와 공백, 그리고 무한으로 뻗어나가는 숫자 사이를 진동하며 현실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확장하는 가상현실의 세계를 축조해간다. 그 속에서 연결을 탐욕적으로 갈구하는 몸들은 팔이 날개처럼 변하고 목이 구부러지고 늘어나며 살점이 얇다 못해 찢겨나가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일상의 시공과 체력을 갈아 넣으며 대상에 집착하는 부박한 몸은 영락없이 ‘신체 없는 기관’, 좀 더 정확하게는 기관의 고정적인 유기성으로부터 탈주하려드는 살갗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유기적 기관의 질서를 초과하는 욕동의 발현은 회로로 연결된 공동의 얄팍한 신체로 현현하고 네트워크의 우주에 부유한다. (작가는 그렇게 나온 내장과 살점들을 오브제로 조합하기도 하는데, 그 모습은 온갖 플라스틱과 파이프들이 얼기설기 엉켜 있는 덩어리에 가깝다.)

네트워크에 체화된 몸이라는 해석을 조금 더 연장한다면, 화면 전반에 방사하고 신체 곳곳에 뻗친 직선은 중세 유럽의 성상화에서 신의 말씀을 전하는 천사의 언어가 빛으로 시각화하는 모습을 연상할 수 있다. 휴대 가능한 모바일 패널로부터 쏟아지는 전능한 빛(omnípŏtens lūmen)이 몸을 침투하고 잠식하며 구속시킨다. 디지털 네트워크의 비전은 몸을 뒤틀리게 하는가 하면 형상 보존의 임계를 찢어 몸으로 하여금 네트워크의 유속에 제 영혼을 봉헌하는 사자(使者)로 만든다. 종종 직선으로 표상된 말의 파편들이 화면에 직접적으로 튀어나오기도 하는데, 그것은 의미 없는 키득거림과 개구진 은어들로 화면에 얼룩처럼, 또는 그럴듯한 엠블럼처럼, 하지만 별다른 의미를 찾을 수 없는 맥거핀처럼 각인된다. 각각의 화면들은 캐릭터 카드 프레임 형태의 액자형 구성 아래 맞춰져 독립성을 갖는 동시에 다른 화면들과 하나의 세트로 묶인다. 화면에는 캐릭터를 표현하는 원소가 배경과 전면을 투과한다. 다소 고전적인 분류를 차용하는 게임 컨셉을 역으로 차용하는 작업은 원소를 표현하는 필법을 구사하며 동양화의 정조를 개입시키는데, 그것은 게임 네트워크의 체제 아래 몸이 절합되고 욕망이 예속되는 상황을 원소 알레고리로, 또는 점술카드의 시각형식으로 구현하는 모습이다.

게임이 몸의 리듬을 재배치하고 일상의 시간표를 재구성하는 차원에 나아가 작가는 게임을 소재 삼아 게임의 알고리즘이 만들어낸 관계 자체를, 관계를 바탕으로 관계의 조건을 거슬러낸다. 게임에 밀착하는 생활이 바탕 하는 작업은 소비와 미적 실천에 집착하는 인물을 동양화와 불화에 빗대어 표현한 <분신>(2011)과 <유미독존도>(2014)에서 분기하는 것이자, 그 자체 커다란 게임의 질서를 화면에 옮겨내고 화면에 재배치되는 몸을 빠른 필치로 재구성한 결과물이다. 게임 생태계를 모티프이자 질서로 전유하는 작업은, 회로에 포섭되는 과정을 거슬러내는 수행의 일환이다. 네트워크는 일상의 시간과 몸의 리듬을 전자 단위로, 신경의 전기신호로 시간과 신경망을 쪼개며 정신을 분산시키고 경계를 흐린다. 영혼을 잠식당한 타동적인 주체성에 필연적으로 생기는 공백, 헛헛한 존재의 빈자리에 시시때때로 방향과 대상을 변주하는 욕망의 파도가, 게임에의 열망이 물결친다. 증강 너머 포화 현실로서 모바일 네트워크의 압도적인 영향력은 주체를 회로에 겨우 정박시키는 모습이다. 살을 파고들어 잠식해가는 회로의 운동과 그로부터 도주하는 살과 내장 덩어리들은 호소하듯 쏟아져 나오지만 몸의 섬유와 파도와 바람을 그려 넣은 세필의 너울에 이미 압도당하고 포획되며 더러는 함께 출렁인다. 그리고 찢겨나간 몸을 향한 시선은 그 최전선인 눈으로 향한다. 눈빛은 몸을 식민화한 네트워크 회로의 승전보일까, 잠식당한 몸의 텅빈 응시일까, 또는 잠식 직전의 호소일까. 영혼의 거울로서 정면을 응시하는 동그란 눈은 텅 빈 응시일까, 대상으로 가득 채워진 탐욕의 시선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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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바일 네트워크 기반의 생태계가 구성원의 욕망을 예속시키고 조정하며 조작할 수 있다는 가설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DNA를 복제하고 조작‧변형하여 재접합하는 유전공학이나 인식과 판단의 알고리즘을 세분화하여 뇌파와 혈류 변화에 따라 반응할 수 있는 로봇공학의 기술적 지향은, 최근 일론 머스크가 공개한 두뇌 관련 기술 스타트업 뉴럴링크(Neuralink)의 '뇌-기계 인터페이스(Brain-machine interfaces·BMIs)'로 한 걸음 현실 앞에 다가선다. 뇌에 컴퓨터를 연결하는 ‘브레인 임플란트’는 그것의 실현여부를 떠나 디지털 기술이 몸과 의식의 손상여부를 체크하고 관리하며 감시할 수 있다는 시나리오를 설파하는 것만으로도 자본을 증식하며 ‘산업의 산업’으로서 청사진을 그린다.

여기서 질문은 기술의 프레임에서 조금 엇나간다. 디지털 회로가 몸과 의식을 번역하고 잠식해올 때, 잠식된 자리에는 어떤 재현들이 가능할까. 또는 여전히 포획되지 않은 자리들이 어떻게 제 (비)영역을 표명하고 있을까. 이를 예술적 실천의 차원에서 이야기할 수 있다면 다음과 같은 표본을 들어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가령 김태연의 화면이 내장과 체액들을 살갗에 얇은 필치로 분할한다면, 박진희는 화면 위에 물감을 휘저으며 세필이 분할하지 못하거나 세필이 분할하는 틈을 비집고 나온 차원을 드러낸다고 말이다.

물감으로 가득 채워진 화면은 김태연의 회화와 나란히 놓이며 회로와 신체를 관류하는 체액들은 아닌가 하는 문학적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가령 푸른 톤의 화면은 네트워크에서 경계를 관통하는 점액의 세계를, 경계 자체로서 유기물과 무기물의 중간지대를, 신경세포와 회로의 접속점 자체의 풍경을 떠올린다. 화면에 도드라지는 푸른색, 구체적으로는 에메랄드와 비취, 민트와 하늘색이 어디에서 기인하는가는 알 수 없지만, 색상들이 미술사 곳곳에 상이한 표현과 발색으로 쓰였음을 참조할 수 있다. 한편에서 파란색은 황금색과 함께 성상화의 성스러운 배경색부터 죽은 몸에 깃든 부패와 초월 사이 어딘가의 흔적으로 소급한다. 또는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에서 얼굴의 명암과 풍경의 빈자리를 채우는 녹슨 청동의 색으로, 밤의 그림자를 채우는 빛과 어둠의 경계로, 습지와 이끼, 수풀에 이르는 공간을 구성하는 빛과 그림자에 투과된 색으로 쓰였음을 찾을 수 있다. 일련의 기능과 의미는 이브 클랭에 이르면 ‘모든 기능적 정당화로부터 해방된, 파랑 그 자체’의 색으로, ‘인터내셔널 클라인 블루’(International Klein Blue, IKB)라는 특허출원 상표로 독점되기도 한다.

같은 색상일지라도 상이한 안료와 필치에 따라 쓰임과 물성의 효과를 다르게 펼쳐놓는다. 푸른색의 지층 위에서 박진희는 정적인 풍경과 경직성을 헤치듯 물감을 속도감 있게 펼쳐 놓는다. 화면은 캔버스의 표면 위에 육화한 풍경으로 시선을 유도한다. 특히 작가는 고체와 액체 사이 점액질처럼 화면에 흡착한 물감의 물성을 활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선과 면, 텍스처와 덩어리, 사물과 풍경을 연결시키는 감각적 효과를 전달한다.

물감의 물질적 속성은 인공물과 자연물 사이 도식적인 구분을 엉켜내며 화면 자체를 육화된 풍경으로 열어낸다. 화면은 자연과 도시의 소재와 패턴을 대상으로 삼지만, 뒤엉킨 물감들은 자연과 인공물의 구분을 관통한다. 파스텔톤 색감은 질척이는 진흙 또는 체액 등의 유기물을 연상케 하지만 그의 붓질은 유기적 생태구조를 탈구하며 풍경을 추상해낸다. 통념적인 자연의 프레임을 찢어내기 위한 부단한 붓질은 동시에 인간의 상징과 재현 체계가 이해와 분석의 차원으로 여과할 수 없는 지점들을 푸른 톤의 색채로 담는다.

세계의 표상으로서 회화에 작가는 특수한 맥락을 접목한다. 가령 화면에 구사하는 마티에르의 동세는 작가가 숙련해온 과정 속에 이동을 반복해온 경험을 참조할 수 있다. 뉴욕과 독일, 런던과 서울로 거처를 옮기면서 그는 지역의 풍경과 구성원의 성향과 시각 예술의 경향을 습득하고 이를 자신의 작업으로 이어나간다고 전한다. 장소 특정성의 개념을 조금 비틀어 장소 반영성(Site-Responsive)이라고 명명하기도 했던 그의 작업은 체류장소의 특수성뿐 아니라 그 속에서 살아가며 감각하는 경험을 바탕하며 이동성만큼 빠른 필치로 물리적, 시간적 변화를 화면에 채운다. 그것은 온전하게 장소를 반영하는데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특정 장소의 추상적 감각으로부터 이동성을 체화하여 프레임에 담는 시각적 양식화에 가까워 보인다.

화면의 형상들은 도시에서 산과 바다를 오간다. 그렇다고 대립적 이항관계에 몰두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차라리 이항적 요소들은 하나의 화면에 다시금 양식화되고 재배치되는데, 고정된 화면은 이동과 정지의 긴장을 모두 담아낸다. 도시의 역동과 내적 고립의 공간은 다시 질척이는 습지의 화면으로 회귀한다. 교섭과 충돌의 풍경으로서 회화라는 접경지대에 작가는 습지를 모티프 삼는다. 이른바 ‘습지의 회화’는 김태연의 경우처럼 얇은 종이 위에 넓게 펼쳐놓기보다 물감의 층과 선들을 수직으로 쌓는 방식을 취한다. 바탕 면에 뻗어나가고 분기하거나 터져버리는 선들은 기존 누적된 물감 위에 곧잘 덧씌워지고 형태와 표현을 변주한다. 그것은 정교한 계산을 바탕 삼기보다 몸이 움직이는 속도와 손목의 스냅과 관절의 움직임에 직각과 곡선, 패턴을 뻗어내며 몸에 화면이 연동하는 즉흥곡의 작법을 따른다. 닫힌 캔버스 위에 물감을 빠르게 채우는 작업에는 스트로크의 자율적인 운동과 캔버스가 제공하는 한정적 스케일의 긴장이, 매 순간 화면의 심미적 균형을 계산하고 조율하며 판단해야 하는 취사선택의 우연적인 판단이 작동한다. 추상 페인팅을 바탕으로 삼지만 화면에는 작가가 참조하는 사물과 풍경의 심상이, 도시의 신경망과 습지의 소재들이 얽히고 설긴 이항적 요소 간의 분별하기 모호한 패턴들이 채워진다. 빠르게 관류하다가도 두껍게 쌓이고 그 과정에 줄기와 봉오리를 만들며 화면에 청색조 물감의 풍경을 남기는 작법은 몸과 의식적 판단 사이의 간극을 즉흥적인 감각적 표상으로 밀착시킨다. 김태연이 필법을 구사하며 넓은 바다의 투명함과 원소의 속성까지도 네트워크의 회로 아래 펼쳐낸다면, 박진희는 몸의 움직임을 통해 회로의 구속으로부터 붓의 동세를 변주하면서도 세계의 텍스쳐를 고안하며 온갖 유기물과 무기물들이 밀집된 환경을 물감으로 체현한다. 그것은 ‘시선을 열기 위해 눈꺼풀을 닫는 내밀한 행위’4) 에 근접하면서도 세계를 보는 시선을 열어내기 위해 클리셰의 눈꺼풀을 닫는 역설적 상황보다는 강력하게 예속된 풍경으로부터 탈주하기 위해 수다하게 획을 긋고 패턴을 달리하는 절박한 시도처럼 도드라진다. 고립된 화면에 겹치는 선들의 흔적은 그가 예속으로부터 탈구하고자 했던 획들의 흔적으로 패턴을 만들고 화면 위에 풍경을 만든다. 빠른 유속의 물감들이 엉겨 붙은 바탕 위로 솟아나고 가로지르며 소용돌이치는 선들은 회화적 혈관과 줄기를, 몸의 기관들과 수풀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이러한 추론은 작가 개인의 경험을 참조하여 그의 작업에 입체적으로 조명해볼 수 있다. 끊임없는 이동 속에서 표현의 변화를 시도하고 동료들과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도 그는 방 안에 홀로 남은 시간을 언급한다. 사방으로 연결되고 장소를 이동하며 바뀌지만 방은 공통적으로 닫혀 있는 사적 공간이다. 이를 감안하면 사색하고 생각을 만들고 지우며 때론 내밀한 관계를 나누는 문턱의 장소로서 방은 비어 있는 캔버스에 연동한다고 상상할 수 있다. 도시와 자연이라는 이항적 요소와 이동성은 한데 엉키는 습지로, 그것이 회화의 형식으로 추상화되는 방이라는 단추에 꿰어진다. 그것은 현대미술의 지역적 양식들을 습득하고 그것을 자신의 양식으로 고안하기 위한 내적 공간으로도 공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습지의 회화는 질료와 지지체를 달리하기도 한다. 《Tent Pitch》(2018)와 <알마즈>(2019)에서 작가는 습지의 지표인 양 건초더미를 전시장 바닥에 가득 깔아놓고 회화와 오브제를 전시하는가 하면, 변기와 침구류 등 몸이 긴장과 의식을 내려놓고 다른 몸과 뒤엉킬 수 있는 소재로 붓을 옮긴다. 캔버스와 오브제에 걸친 수행은 파스텔 톤의 가벼운 색채를 구사하며 육체의 뉘앙스를 체화시키면서도 몸의 전형적 형상과 색감을 거스르며 추상적 성애의 실천으로서 회화를 남긴다. 화면은 물감을 매질로 성적 스킨십이 심미적으로 이뤄지는 개념적 장이 된다. 그것은 바탕면의 물리적 제약과 한계 위에서 그 너머와 이면의 차원들을 호출하고 연결시킨다.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 자연을 드러낸다는 것’5) 으로서 회화의 수행은 물감을 매개로 캔버스와 캔버스 사이를 흐르며 도시에서 도시로, 방에서 습지로 반영적으로 굴절하고 맴돈다. 화면은 몸이 지나간 흔적이기도 하다. 감각적 손짓과 물감의 질료가 반영한 형상은 자연의 표상을 모사하고 재현하기보다 표현행위를 통해 무엇인가 있음을 증명해낸다. 끝없는 이동과 접촉 속에서도 고립을 자처하고 구성하는 표면의 이미지는 다른 사람의 의식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소생할 수 있는 경험을 환기시킬 수 있기를 기다린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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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세계를 반영하고 드러내는 두 작업은 공통적으로 동세를 강조하고 즉흥적인 요소가 짙다. 사전 계산과 숙고의 시간을 요하기보다는 세계에 반응하며 속도를 높이는 모습은 더러 몸의 관성적인 움직임을 전형적인 소재와 형상으로 노출하기도 한다. 어느 지점에 덧칠을 하고 소재를 추가하며 시각적 완결성을 판단할 것인가를 순간적인 감각에 의지하는 것은 의도치 않은 불명료함을, 관성적인 몸의 움직임과 재현의 패턴을 반복하기 쉽다. 작업 공정이 어느 정도 자리매김 했다면, 이를 문법으로 재가공하여 비평적으로 재차 거스르고 분기시키는 것이 이후 작업의 후속 과제가 될 것이다.

두 작가는 디지털 모바일 네트워크로부터 몸을 포획하는 회로와 그로부터 탈주하는 물감의 감각적 수행을 담는다. 한편에서 네트워크에 예속된 타동적 포지셔닝으로부터 시스템의 프로세스를 거슬러 읽으며 재배치된 몸과 관계를 비평적으로 시각화한다면, 다른 편에는 끊임없는 유속과 접촉으로부터 고립된 장소로서 방과 화면을 포개고 이를 침투와 개입이 이뤄지는 장소로, 유기물과 무기물이 모여드는 습지로, 물감을 매개로 화면에 육화하는 작업으로 연결시킨다. 그것은 연결의 기술을 세공하고 그 시도를 지속하면서 형식으로서 예술 실천이 이어지는 지점에 공명하는 바, 온-택트의 존재적 실천이 지향하는 지점이 아닐까. 이들은 모든 구멍을 열어 회로에 연결하고, 이동성의 피로와 소통의 과포화상태로부터 방과 습지와 같은 고립되고 가라앉은 공간을 확보하며 내면에 침잠하는 시도를 예술형식으로 창안한다. 정신분산과 일시정지의 균형을 맞추며 표현의 양식을 창안하는 시도들은 또 다른 관계의 방식을 세공하며 관계하는 몸을 재구성한다.

전시제목On-Tact 온-택트

전시기간2021.01.13(수) - 2021.02.21(일)

참여작가 김태연, 박진희

관람시간10:30am - 05:30pm
일 12:00pm - 06:00pm

휴관일매주 월요일

장르회화

관람료무료

장소공근혜갤러리 Gallery KONG (서울 종로구 삼청동 157-78 )

연락처02-738-7776

Artists in This Show

태킴(Tae KIM)

1986년 서울출생

진희박(Zin Hee Park)

1984년 서울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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