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현경 [호우시절 好雨時節 It Was Beautiful Days]

2020.05.07 ▶ 2020.06.05

갤러리 나우

서울 강남구 언주로152길 16 (신사동)

Map
  • 유현경

    금각사 2, Kinkakuji 2 Oil on canvas, 120x120cm, 2019

  • 유현경

    금각사 1, Kinkakuji 1 Oil on canvas, 160x160cm, 2019

  • 유현경

    금각사 3, Kinkakuji 3 Oil on canvas, 140x140cm, 2019

  • 유현경

    바람 Wind Oil on canvas, 50x40cm, 2011

  • 유현경

    열심히 일해야 해, Should Work Hard Oil on linen, 136x337cm, 2014

  • 유현경

    내마음 깊은 곳에 남겨진 얼굴, A Face Left Deep in My Heart Oil on canvas, 50x40cm, 2011

  • 유현경

    소라 7, Sora 7 Oil on canvas, 91x65cm, 2019

  • 유현경

    신재연4

Press Release

현재 독일에서 작업하고 있는 유현경의 <호우시절>展이 갤러리나우에서 열린다.
유현경은 모델이나 대상을 보고 그들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모델이나 대상의 특정상황, 대상이나 모델에게서 느껴지는 그것 즉 감정적 느낌, 대기감, 대상의 아우라, 관계성 등을 통해 이입되는 에너지를 자신의 목소리로 변환해서 캔버스에 그려나가는 작가이다.
그 동안 추상표현 인물화를 주로 그려온 유현경이 이번에는 금각사를 그린 그림이 3점을 포함하여 새로운 풍경들과 인물 신작들을 보여준다. 그녀의 그림은 대상을 보고 있으되 보이지 않는 느낌과 기운, 자신의 심리상황 등 비가시적인 영역을 가시화하는 작업인데 그녀의 최근작에서는 새로운 심리적 변화가 감지된다.
“어둠은 점점 엷어지고 그것은 나만의 착각이 아니라 실재임을 그림이 방증할 것이다. 사람의 어두운 얼굴만 보이고 풍광의 쓸쓸한 모습만 보였는데 언젠간 어둠이 더 이상 나의 관심 요소가 아니어서 그 어둠을 볼 수 없는 날이 올 것이라 믿는다. ”(작가노트발췌) 이번 전시에서 발표하는 작품<금각사>가 바로 그것이다.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는 유현경이 가장 좋아하는 소설 중 하나로 징그러울 정도의 노골적인 문장 구사, 감정을 표현하면서도 거기에 매몰되지 않고 수단으로 내용을 감당한 지점에서의 작가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고한다. ”뜨거움은 전달 하되 냉정하고 차가운 방식으로의 은유. 이 지점이 작가가 유지해야 할 온도라고 생각하고 <금각사>를 마음에 담아두었어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소설로 드러내는 마시마 유키오의 금각사는 소름끼칠 정도로 아름답고 담백한 건축에 대한 찬사를 표현하고 있는데, 금각사의 극한의 화려한 금장과 담백하고 절제된 건축적 표현양식과 만나는 것처럼 소설의 온도와 유현경의 감성과 직관이 만나는 지점에서 드러난 작업으로 보인다.
이번 전시에서는 이전의 작업들과는 달리 어둠에서 벗어나 밝음으로 가기 위한 과정에서 그 밝고 좋은 기운이 전달되는 작업들을 보여준다. 그래서 그의 이번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그냥 기분이 좋다. 이는 작년까지 설악에서 작업하며 자연과 가까이 지냈고, 작업공간이 바뀜으로 그동안의 과거를 좀더 관념적으로 이해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풀어냈던 것으로 보인다.

“인물을 보는 태도에서는 제 편에서 보던 방식에서 상대의 편에서 보는 방식으로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과거에는 제가 보고자 하는 일부의 모습으로의 인물을 그렸다면 지금은 과거보다 상대의 모양을 듣고 보는 방식으로 그리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이전의 작업에서 자신의 느낌에 충실했다면, 이제는 기억하고 싶은 과거, 대상과의 호상간의 관계성에 더 주목한 작품들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어두웠던 과거에서 벗어나서 밝고 경쾌하게 바뀐 그의 새로운 모습을 느낄 수 있는 자리이다.
■ 이순심


“존재의 참을 수 없는 불안감”

1. 두려움의 한 표현으로서의 회화행위: 유현경의 그리기 방식과 태도

"Ogni pittore dipinge se"(모든 화가는 (결국) 자신을 그린다)

이 문장은 르네상스 시대에 나왔던 회화에 대한 수많은 정의 중 하나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최초의 언급자라고 추정되어지는데, 이러한 추정은 모나리자의 얼굴 속에서 다빈치의 페르소나(persona)가 포함되어 있다는 학계의 이론으로 개연성을 얻고 있다. 이후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부터 잠바티스타 벨로리(Giam Battista Bellori)에 이르는 16-17세기의 미술이론가들은 미술에 대한 수많은 정의들을 던졌지만, 위의 화두는 회화의 형식이나 양식이란 물리적인 요인이 아니라, 심리적인 차원과 맥락에서의 정의로 독특한 의미를 갖추고 있다. 예컨대, 화가가 그린 인물은 – 뿐만 아니라, 정물이나 자연적 대상들 모두 - 실상 그 화가를 지향하거나 지시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화가 자신의 닮음이나 연관적 형상성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모든 초상화(인물화)는 화가와 대상과의 고유하고 개별적인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며, 그러므로 그림은 대상만이 아니라, 화가의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의 개입과 참여 혹은 간섭으로 완성되어진다는 것이다.

이 정의를 작가 유현경에게 대입하려는 이유는 - 문장의 의미가 모든 화가들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의미의 작용이 확대되면서 - 작가의 작품 속에 담겨진 기질이나 특성을 추적하게 해 줄 단서로서 활용될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다. 먼저 작가는 인물이나 인물들이 형성하는 사회적 현상들을 다룬다. 물론 그 사회적 현상은 매우 첨예하고 도발적이며, 또한 한정적이다. 이러한 특정된 상황 속에서 작가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 혹은 필자에게 인상을 남긴 것은 정작 작가 자신이며, 나아가 작가의 심리라는 것으로 파악되었기 때문이다.

아직 대학생이던 때에 작가 유현경은 일반인 남성을 공모하여, 그들과 함께 여행하면서 인물화를 그렸다. 자칫 위험할 수 있는(?) 상황까지 이르러서 그려낸 인물화는 그 위험성을 화질로 증명해 주고 있다. 그러나 그 위험성이란 이미 이 계획을 세우는 단계에서 고려되었던 것 같고, 작가는 이것을 감수하는 것을 계획의 중요한 실행조건으로 삼았다. 익명의 낯선 남성을 특정한 장소(모텔이나 여관)에서 그려내는 것은 작가(여성)와 모델(남성)이란 미술사에 있어 약간은 예외적인 관계라는 점 말고도, 이 이성적 관계에서 벌어질 부가적인 상황전개를 주제에 포함시키는 일이었으니까. 이런 긴장감이 있는 관계적 상황 속에서 작가는 인물을 묘사하거나 재현하는 데에 주력 했다기보다는 그 상황이 발생시키는 미묘한 긴장감이나, 어떤 공포감을 표현하는 데에 더 집중한 듯 보인다. 작가는 ‘나약하다’는 여성성에 의식적으로 도전한 셈이며, 이 도전을 실천에 옮기면서 발생되는 가능한 여러 상황 속에서 자신의 심리적 불안감이나 방어기제에서 발현되는 긴장감들을 회화행위로 전이시킨다고 설정해볼 수 있다. 이 설정은 작가가 2009년 전시에 동반한 글에서 사실로 확인할 수 있다: “난 정상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이기도 하고, 비정상적이고 조금 이상하기도 하다. 이 둘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데 불안할 때는 말을 많이 하고 흥분하고 앞으로 걸어가고, 눈을 이상하게 뜨고, 머릿속이 포화상태가 되고, 손잡고 싶고, 떨리고, 잔인한 생각을 한다. 이러한 상태가 찾아오면 사람들이 표피적으로 보이며, 발가벗겨서 경멸하기도 하고, 마구 사랑하기도 한다.”



2. 소리 없는 절규 혹은 플롯 없는 서사: 그림의 구성과 특징

<불면증>이나 <배산임수촌>, <좁은 문> 등 2009-10년에 제작된 그림들은 평면에 병렬된 공간성을 지닌다. <학교>는 서울대 미대를 다니거나 나온 사람들은 금방 알아차릴 수 있도록 미로와 같은 복도 그리고 층수를 알 수 없는 계단의 연결이 그림 속의 공간으로 재구성되어 있다. 깊이의 논리적 혹은 물리적 전개가 평면 위에서는 상하좌우로 펼쳐지고, 이것은 시간의 구조인 것처럼 배치된다. 즉 평면에 펼쳐진 공간은 ‘미로(labyrinth)’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이러한 구조 속에서 이야기가 생성되는가? 라는 질문을 하게 되는데, 아무리 이야기를 구성해 보려 하지만, 단편들의 짜깁기 이상으로 연계되지 않는다. 단편마다 인물들이 등장하여 특정한 행위와 사건을 - 이를테면 섹스 – 보여주지만, 병치된 사건들은 행위의 유사성을 제외하면, 플롯 혹은 기승전결을 형성시키지 않는다. 공간은 인간의 활동을 위한 깊이를 제공하지 않으면 왠지 불안해지는데, 작가의 공간은 특히 그렇다. 깊이 없는 공간의 틈 없는 병치와 배치가 한편으로는 답답하고, 한편으로는 불안감을 형성하는 것이 작업의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2011년 이후에 제작된 인물화들에서의 공간은 거의 극단적인 공허함으로 치닫는다. 공간은 매우 암시적으로만 표현되는데,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인물을 그리던 필치와 색채가 그대로 외부의 배경으로 확산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결국 작가는 인물과 (주변)공간은 구별하기보다는 인물의 존재와 성격을 분위기와 등치시키거나 중첩시켜버린다. 이런 그리기 방식은 기존의 방식으로 그려진 인물화에서 기대되는 이목구비의 개성이나 인상 따위는 뭉개버리고, 인물이 발산하는 심리적 상황에 몰두하는 것으로 비춰진다.



3. 존재의 참을 수 없는 두려움: 존재의 정체성을 긍정하는 방식으로서의 공포감

자신을 포함하여 인물을 그리는 행위는 회화에 있어서 가장 원초적인 것이며, 이는 과거로 소급되는 미술사적 연구에서 부단하게 추구되는 것이다. 동시에 이것은 궁극적인 것이어서, 앞으로 인간에 의한 조형예술적인 생산이 안고 있는 숙명적 과제를 함께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맥락에서 유현경의 그림들은 기초에 착안하고 있으며, 또한 그것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명확하게 자신의 위치를 정하고 있다. 그러나 작가 개인의 스타일이나 특징으로서 과거 인물화의 상식적인 부분들을 자신 만의 독특한 화법을 위해 사용하거나, 이를 왜곡시키고 있는데, 바로 ‘응시(凝視)’라는 형식과 ‘흐리기’라는 연출방식이다.

응시와 흐리기는 유현경의 작은 인물화에서 주로 관찰되는 내용과 형식이다. 대개의 인물들은 작가를 응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몇몇의 예외는 있지만, 이 경우도 모델의 응시는 다른 방식으로 해결되고 있다. 2011년도 즈음에 그려진 <가난한 사람>, <차분한 사람>, <죽은 사람> 등은 응시와 흐리기가 공존하는 양태를 보인다. 응시의 전제조건은 대면(en face)이다. 사진이든 회화든 응시는 모델과 작가가 양립된 주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해준다. 관찰하는 대상과 관찰자가 상호관계라는 점이다. 특히 정면응시의 경우는 거울 바라보는 사람이 자신을 두 개의 존재로 설정하는 것처럼 정신분석학을 비롯한 심리학적 영역에서 매우 의미심장하고 때론 무서운 상황이다. 이 상황은 작가가 모델을 대면했던 순간이기도 하지만, 작품으로 형상화되면서 관객과 그림 사이의 전이된 상황으로 전개된다.

앞 장에서 설명한 흐리고 모호한 인물화의 형상들은 어쩌면 응시가 갖는 공포감에 대한 작가의 대응이라고 추정된다. 물론 작업의 형식이 갖는 즉흥성이나 신속성 따위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도 있지만, 형상들에서 즉각적으로 인지되는 응시의 자세는 분명하며, 그래서 흐리기는 그 응시에 대한 방어기제이자, 그것의 회화적 방편으로서 더 큰 의미를 갖을 수 있다고 본다.


4. 회화의 경험을 추체험하다: 결론

아직 작가는 작업의 목적지를 정해 놓지 않았고, 발전의 지도 또한 예측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작가는 아직 신진의 티를 벗지 않았다. 나이로 보나, 그가 던지는 발언의 정서로 판단하나 그렇다. 단언하지만, 사람을 그리는 일은 줄 곧 이어질 전망이다. 미술은 결국 그리고 어떻게든 사람의 삶이나 그 양태를 그려내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작가가 지향하는 것은 결국 사람들의 모습에 얹어서 표현할 자신의 감정과 속내라는 점에서 더더욱 그렇다. 그 감정을 공유하는 방식으로서 회화는 작품이 포착한 아니면 반사된 작가의 정서적 상태이다. 그 중에서 필자는 불쾌함, 불안, 초조, 경계심 따위를 먼저 파악하였다. 언급한 감정들은 그림을 그릴 당시, 아직 당면할 사회에 대한 준비나 경험으로 무장하지 않은, 그야말로 스스로 위험한 상황에 자신을 던져버린 여성작가의 심리 속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또한 누구도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대개 동년배의 그리고 비슷한 주제를 다루는 여성작가들은 이 상황을 시니컬하거나 사회비판적이거나 아니면, 남성의 욕망에 순응하거나 도발하는 형상성으로 표현했지만, 정작 작가 자신의 내면을 적극적으로 끌어내오지는 않았다. 90년대 이후 현대미술에서 여성작가의 비중이 점차 높아지고, 특유의 여성성이나 시각을 작품의 주제나 제재로 삼아서 다양한 작품들을 제작하고 있지만, 가장 기초적인 회화작업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일은 유현경이 유일하다 싶을 정도이다. 그의 작품을 들여다보는 50대 초로의 남성인 필자는 어느덧 낯선 남자 혹은 여자 앞에 무방비로 앉아있는 그래서 왠지 불안하고 거북하며, 경계심 많은 젊은(혹은 어린) 여자가 된다.
■ 김정락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수)



[작업노트]

누군가를 오래 만날 수 있다면 그것은 그가 어떤 과거를 보냈고 현재 그 과거를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보는 것이 즐거운 경우에 한할 것이다. 그것은 가장 좋은 텍스트이지만 아쉽게도 상대의 과거를 곁에 두고 향유하기에 개인들은 너무도 분주하다. 그럼에도 매력적인 사람을 생각하는 것 만으로도 무척 즐거운 삶이기에 노년은 깊고 아름다울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노년이 불안한 인물을 떠올리는 것 만으로도 마음이 무거워진다. 느린 걸음이 느린 것이 아니라 적절한 것이 될 수 있도록 안고 갈 역사가 많기를. 그 느림이 초조하지 않기를 바래 본다.

누가 나에게 어떤 사랑을 했는지 물었다. 나는 그 사랑 때문에 아버지를 극복했다고 답했다. 그 사람은 깔깔깔 웃으며 나는 사랑을 알지 못하며 내가 한 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말했다. 나는 그 사람은 사랑을 해본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를 극복하지 못했고 아직 아버지의 품에서 살고 있는 아이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어떤 말을 해도 무섭지 않았고 어떤 말을 해도 이상하게 화가 나지 않았다. 아버지를 극복해야만 사랑을 할 수 있고 그것이 사랑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기억하는 오래전부터 힘든 날은 여지없이 아버지의 꿈을 꾸었다. 그를 만나면서 그 꿈의 빈도가 점점 줄어들었다. 아버지에서 시작한 꿈은 꿈의 중간 즈음부터 그의 얼굴로 바뀌었다. 우리가 세상에 나와 처음 마주하는 가장 큰 사람. 우리 앞에 우뚝 서있는 존재. 그 절대자로서의 아버지의 자리에 그를 가져다 두고 그 무게를 부여했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많이 좋아했지만 내가 부여한 자리가 너무 높아서 작은 실수와 잘못에도 크게 미워했다. 아버지를 극복하지 못한 채 그를 만났다. 한참 뒤, 그에 대한 미움과 미안함과 그리움으로 골몰하던 어느 날, 아버지를 잊었음을 깨달았다.

그가 내가 어둠에서 나오길 권고했을 때와 어떤 류의 음산함을 경계했을 때 나는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를 만나며 사랑 혹은 사랑이라는 명목의 섹스가 있었지만 그가 가고 난 밤들의 어둠과 음산함은 덮으려고 애를 써도 폐색하게 드러났다. 나의 어둠과 내 문제(때문이라고)라고 말했다. 어둠에서 벗어나기 위해 멀리 도망치며 관계의 문제에서 가해자가 되었다. 생존을 위해 갔지만 그곳에서 가해에 대한 죄책감으로 또 다른 지옥을 맛보았다. 도망친 곳에서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절대자의 위치를 그에게 부여했기에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자리에서 기다릴 것 같았지만 돌아왔을 땐 떠나고 없었다. 비극이었다. 그 뒤, 외관상 요란하고 물리적인 비극에 부셔졌을 때 아프지 않았다. 비극을 몰랐다면 충격에 다쳤을 것이다. 움직여 지는 대로 가능한 선에서 어그적 어그적 일을 하고 있었다. 나를 여러 번 다치게 했으나 여러 번 구했고 여러 번 아프게 했지만 여러 번 치유했다. 삶의 큰 부분을 위로 받았다.

거절인 줄 알면서도 도망치는 그를 쫓으며 나의 모양이 망가지는 모멸감을 느꼈지만 그 모멸감이 클수록 아이를 버리고 도망친 가해의 죄책감은 풀리고 있었다. 모멸감은 털어내니 시간과 함께 털어졌다. 오래 남아있는 미안함과 죄책감을 어서 그 모멸감으로 바꾸기 위한 (이) 영악한 연극을 다급히 마치고 당분간 어떤 관계도 책임지지 않을 사회로 건너와 영어권이 아닌 나라에서 기본적인 의사 표시 외에 미묘함을 만들 수 없는 불충분한 영어 구사를 가지고 이방인으로 간주되는 지금. 마침 통행이 금지되어 아무도 없는 도시의 문화 유산을 걸으며 봄의 공기와 낮이 밤으로 바뀌는 저녁의 불빛과 집에 가는 길의 맑은 바람을 느끼며 행복하다. 이방인으로 작업실과 집 사이를 오가다가 작업실과 집이 속한 사회내에서 부정과 부패와 부조리에 실망하게 되면 또 잘 모르는 사회로 이동할 것이다.

그가 떠난 후 한동안 비어 있던 아버지의 자리에 아버지로 등극한 나는 이제 남성 어른과 어른 여자들을 무서워하지 않고 그들의 반대와 비판에도 크게 아랑곳하지 않으며 책임져야할 것들을 보호한다. 아이가 세계에 대해 갖는 겁과 경계로부터 벗어나 두려움 없이 지내기로 한다. 나의 삶은 아버지를 잊기 전과 아버지를 잊은 후로 나뉘게 되었다. 아이에게 사랑을 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사랑을 경험해서 이 큰 세계에서 자유 의지를 가진 독립체로 선택에 따른 책임을 감당하며 돛대를 잡고 항해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선체의 앞에서 키를 잡고 운행하려면 너가 선택할 수 없이 부여된 것들로부터의 무게를 버리고 그 어떤 부채와 빚도 없이 자유롭게 살아가기 위해 사랑을 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사랑이라는 환상을 궁금해하고 동경하며 그것이 많은 것을 위로해 줄 것만 같은 기대로 괜한 거리를 서성이는 외로운 일들은 없을 것 같다. 대신, 일을 마치고 따듯한 집으로 서둘러 돌아가 천천히 요리한 저녁을 먹고 불을 끄고 잠이 든다. 사용하지 않는 곳들은 불을 껐다고 생각하는데 다시 나와보면 또 불이 켜져 있다. 기분이 좋지 않은 날은 불을 켜고 잔다. 가장 무서운 것은 어둠이다.

어둠에서 벗어나기 위해 투쟁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 노력했지만 턱없이 부족했을 수는 있을 것이다. 어둠은 점점 엷어지고 그것은 나만의 착각이 아니라 실재임을 그림이 방증할 것이다. 사람의 어두운 얼굴만 보이고 풍광의 쓸쓸한 모습만 보였는데 언젠간 어둠이 더 이상 나의 관심 요소가 아니어서 그 어둠을 볼 수 없는 날이 올 것이라 믿는다. 마치 처럼. 이제서야 맑은 것에 집착했던 그의 어둠을 본다.

그림은 과거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에 대한 혹은 어떻게 이해하고 싶은지에 대한 마음을 반영하는 시각적 결과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글을 썼다. 과거가 극복되고 잊히지 않는 한 같은 과거를 계속 다르게 반복하고 번복한다. 나는 다르다고 하지만 사람들은 매번 같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게. 나는 매번 다른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매번 같은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게.
■ 유현경

전시제목유현경 [호우시절 好雨時節 It Was Beautiful Days]

전시기간2020.05.07(목) - 2020.06.05(금)

참여작가 유현경

관람시간10:00am - 07:00pm

휴관일월요일 휴관

장르회화

관람료무료

장소갤러리 나우 Gallery Now (서울 강남구 언주로152길 16 (신사동) )

연락처02-725-2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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