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운(Yoo Young-Wun)

1972년 출생

서울에서 활동

소개말

매스 미디어라는 사회적 존재에 관한 성찰

매스 미디어는 동시대의 사유와 감성을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소통 기제이다. 매스 미디어는 사람들을 낱낱의 개인이 아닌 하나의 덩어리(mass)로 만들어버린다. 거꾸로 말하면 매스 미디어의 작동 아래 사람들은 각자 나름의 창의적인 사유와 감성 체계를 가진 개인들이 아닌 거의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현대인의 사유와 감성을 소유한 대중으로 훈육된다. 유영운의 작업은 소비사회를 지배하는 매스 미디어에 대해 비판적 성찰을 담고 있다. 그는 나도 알고 너도 알고 우리 모두가 다 아는 것을 유포하고 확대재생산하는 매스 미디어, 다시 말해서 소비사회의 대중을 상대로 사유와 감성을 조작하고 운용하는 공공영역으로서의 매스 미디어에 대해 그 본질과 속성이 무엇인지를 각성하도록 만든다.

유영운은 종이에 인쇄된 이미지와 텍스트들을 이용한 캐릭터 조각을 가지고 사회적 존재로서의 매스 미디어를 물질적 실체로 포착한다. 유영운의 캐릭터 조각은 인쇄물이라는 물질로부터 출발했다. 그는 잡지와 전단지 같은 인쇄물을 매스 미디어의 면면을 대변하는 물질로 파악하고 그것을 캐릭터 조각의 스킨으로 사용했다. 매스 미디어가 우리에게 안겨주는 일방적인 이미지를 뒤집어보는 것이 유영운의 첫 출발이었다. 그는 이것을 ‘미디어의 역습’이라 명명했다. 대중적인 유명세를 가지고 있는 이미지들의 허구적 판타지를 풍자한 그의 작업들은 지난 5년여 동안 이어졌다. 그는 우리에게 종이 인쇄물의 존재가 여전히 중량감 있는 미디어라는 점을 새삼스럽게 각성시킨다. 다시 말해서 디지털과 영상, 인터넷 등의 비물질적인 메커니즘들과 달리 인쇄 매체라는 올드 미디어가 여전히 우리의 일상적 소통을 지배하고 있다는 점을 일깨운다.

인쇄 매체는 근대사회를 만들어낸 결정적인 미디어이다. 인쇄 매체를 통해 대량복제된 텍스트와 이미지들은 근대적 의미의 공공영역을 만들어낸 주역이다. 매체를 접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한 양과 질의 정보를 정기적으로, 지속적으로 주입한 인쇄 매체의 존재야말로 근대사회가 만들어낸 최상의 커뮤니케이션 메커니즘이다. 인쇄 매체의 존재는 근대를 직조해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디지털과 인터넷 혁명에 의해 제2 미디어 시대가 도래했음에도 불구하고 인쇄매체와 같은 제1 미디어의 영향력은 우리를 깊이 감싸고 있다. 유영운의 작업이 우리에게 매우 안정적인 호소력을 가지는 것도 대중적인 아이콘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과 더불어 인쇄 매체의 익숙함 때문일 것이다. 요컨대 유영운은 제1 미디어 시대의 물질적 기제를 가지고 제2 미디어 시대의 매스 커뮤니케이션을 성찰하고 있다.

매스 미디어라는 사회적 존재를 물질적 실체로 포착하려는 유영운의 성찰은 인쇄물이라는 물질을 통해 실현된다. 그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일관성 있게 캐릭터 인형의 정체성과 잡지의 이미지와 텍스트를 연관시키고 있다. 김정일 조각을 만들 때 김정일 관련 텍스트나 이미지들을 프린트해서 그것을 가지고 스킨을 덮는다. 박정희 조각을 만들 때는 박정희 텍스트나 이미지를 쓴다. 그가 최초에 이 잡지인형을 만들었을 때 잡지의 텍스트가 가진 물질의 의미를 되새기고자 했던 것처럼, 지금까지도 그는 잡지의 스킨을 형성하는 종이들을 접을 때 그 종이에 담긴 텍스트와 이미지들을 주인공 캐릭터와 연관한 것으로 쓴다. 김정일 텍스트로 김정일 이미지를 만들고, 박정희 텍스트로 박정희 이미지를 만드는 그의 선택은 최초의 개념을 이행하려는 자신과의 약속이자 우리가 그의 작업에 공감대를 표하는 신뢰의 전제이기도 하다.

그는 낱개의 조각들을 공간설치 개념으로 풀어서 모종의 상황 설정을 시도한다. 상황 설정에 따라서 조각의 크기나 표면을 조절하기도 하며, 작품과 작품들 사이의 관계 설정에 의해 권력관계를 암시하기도 한다. 첫 번째 섹션은 미국의 대중문화 우상들과 한반도의 정치가들을 좌대위에 모시고 경의를 표하는 설정이다. 엘비스와 마를린, 미니마우스, 그리고 박정희와 김정일이 등장한다. 그리스 건축 기둥양식의 좌대 위에 올라선 이들은 각각 고유의 포즈를 취하며 미디어가 조작해낸 허상의 이미지를 드러낸다. 그 앞에는 ‘복어인간’이 이들 영웅 앞에 무릎을 꿇고 환호와 찬미를 보낸다. 유영운은 이들 영웅들을 하나같이 캐릭터 인형같은 인체비례로 희화화 했다. 두 번째 섹션에 등장하는 켄타로우스와 관우, 요정, 인어 등도 마찬가지다.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형상의 전형성을 훼손하는 이들 캐릭터들은 익숙하면서도 낯선 존재들이다.

세 번째 섹션에는 캣우먼, 심슨, 헐크, 스파이더맨, 백설공주, 원더우먼, 그리고 미디어의 눈이 등장한다. 서구의 미디어가 쏟아낸 미디어 캐릭터들, 영화와 드라마, 애니메이션 등을 통해서 익숙하게 알려진 이들 캐릭터들을 변형하고 왜곡한 모습들이다. 이들을 지켜보는 미디어 눈이 서있다. 모두 열두 개의 눈을 가진 이 미디어 맨은 여섯 개의 캐릭터 인형을 바라보고 서있다. 이 작품은 유영운이 말하고 싶은 미디어를 가장 명료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유영운의 작품 대다수가 기존의 캐릭터들을 패러디하는 메타-캐릭터 작업인 반면에 몇몇 작품들은 자신의 아이디어에 의해 드로잉과정을 거쳐 창출된 것이다. <미디어의 눈>에 등장하는 눈들은 각각 다른 표정을 가지고 있다. 노려보거나 곁눈질하는 미디어의 눈들은 흘낏 보고 넘어가거나 딴전을 피우는 것 같으면서도 집요하게 일상을 파고드는 미디어의 속성을 담고 있다. 응시(凝視)와 일견(一見)이 공존하는 매스 미디어의 본질이 이 작품 안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유영운의 작품이 대중적인 기성 이미지를 차용하면서 예술작품으로 성립가능한 것은 그가 비판정신을 가지고 일관성 있게 세상을 바라보고 있으며, 그 시각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출발은 주입받은 것에 따른 감성과 인식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훈육받은 바에 따른 그 모든 것들을 다시 뒤집어보려는 생각. 이것이 예술가의 몫이다. 자신이 알고 있고 느끼고 있는 것에 대한 회의에서 출발한 예술가의 발언은 비판적 메시지를 획득한다. 유영운의 경우도 매스 미디어라는 사회적 존재에 대한 성찰은 모종의 비판적 메시지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그의 메시지는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질문을 던질 뿐이다. 그는 묻는다. 여기 우리시대의 영웅들이 어떤 경로로 이상적인 영웅의 상을 가지고 있는지, 우리는 왜 그 이미지 조작에 동의하고 있는지 알고 있느냐고 묻는다.

유영운의 이번 전시는 그간의 작업들을 정리해서 보여줌으로써 다음 단계로 한 걸음 진화할 준비를 한다는 의미도 함께 가지고 있다. 그가 지금까지 보여준 것은 기성의 이미지들을 끌어들인 패러디 작품들이었다면, 앞으로의 작업들은 그의 드로잉 속에 들어있는 새로운 캐릭터들을 실재화하는 과정일 것이다. 매스 미디어의 강력한 영향력에 비해서 그 영향력이 낮은 전시 미디어를 활용하는 시각예술가로서는 어쩌면 지난 몇 년간의 작업들이 공감대를 확보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의 유영운의 작업은 직접적인 발언보다는 상당히 간접적인 은유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의 이미지 조작은 부정을 염두에 둔 비판이 아니라, 객관적 거리두기로서의 비판이다. 새로운 캐릭터들은 작가의 주관적 감성을 보다 명확하게 드러낼 것이다. 이제 드로잉 북 안에 갇혀있는 전혀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현실화할 순서이다.

유영운의 작품은 사회적 실재로서의 매스 미디어를 시각화함으로써 그것은 매우 구체적이며 실질적인 물질적 존재라는 점을 일깨운다. 유영운의 작업들은 주로 방송매체들을 통해 유포된 콘텐츠들을 물질화 한 것이다. 미술은 물질적 소통과정을 관통함으로써 보다 더 선명하게 메시지를 전달한다. 물질로서의 미술, 우리는 그 한계를 넘어서려고 하면서도 결코 간단히 넘을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오히려 미술이 여하한 관념 세계를 명쾌하게 물질 세계로 드러내는 것에 대해, 즉 불확실한 것을 확실히 존재하는 것으로 현현한다는 점에 대해 안심하고 동의를 표하는지도 모른다. 기호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일은 매스 미디어 뿐만 아니라 전시 미디어 또한 마찬가지의 일이다. 전시라는 미디어가 목표하는 바, 즉 미술작품이라는 물질과 개인의 감상행위라는 채널을 통해서 무언가 커뮤니케이션 하고자 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유영운의 캐릭터 인형들이 가지고 있는 메타포를 해석의 지평 속에서 깊이 헤아려 볼 일이다.

김준기 (미술평론가, www.gimjungi.net)

화살표
화살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