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선의 작업_개미성으로부터의 초대
박은선의 근작을 관통하는 주제는 <성>(城 Castle)이다. 때론 라인테이프와 컬러시트지를 이용한 벽면설치작업으로, 때론 평면회화로, 때론 동영상 애니메이션 작업으로 성을 형상화한다. 성을 형상화한 이 다양한 지점들은 비록 그 기법이나 형상은 다 다르지만, 의미론적으로 상호 보충적이고 내포적이다.
예외가 없지 않지만, 문학에서 성은 대개 왠지 모르게 미심쩍은 장소로 묘사된다. 이 의구심은 성의 이중성으로부터 나온다. 즉 세상으로부터 멀찌감치 외떨어진 곳에 자리하기 마련인 성은 고적함으로 낭만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자칫 그 고적함은 고립감으로 변질되기가 쉽다. 해서, 그렇게 고립된 성에선 뭔가 모를 모종의 암투가, 계략이, 음모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이렇게 <잠자는 미녀>가 잠들어있던 100년 동안 전설을 실현하기 위해 세상 끝에서 온 이름모를 왕자들이 잠자는 미녀와의 키스는 고사하고, 성벽을 감싸고 있는, 미녀와 마찬가지로 주술에 걸린 덤불(미로)을 미처 빠져나오지도 못한 채 죽어갔을 것이다. 미녀가 잠들어있는 성이 주술에 걸렸다면, 프란츠 카프카의 <성>에 나오는 주인공 K는 무지막지한 관료사회의 장벽에 갇혀, 결국 그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도록 운명 지워져 있다. 중세의 성이 죽음에의 유혹(그 이면에 에로티시즘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을 암시한다면, 근대의 성은 고도로 제도화된 사회를 상징한다. 그리고 모래 위에 지은 성(마찬가지 의미지만 모래로 지은 성)이 있다. 사상누각 혹은 공중누각. 여기서 성은 말할 것도 없이 허망한 욕망을, 헛된 수고를 상징한다. 그리고 그 의미는 자본주의의 욕망으로 확대 재생산된다. 현대판 성이라고나 할까.
이 가운데 박은선의 성은 적어도 표면적으로 볼 때 자본주의와 그 욕망에 연동된 사상누각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영상작업에서 성은 마치 흰 개미떼가 지나고 나면 남아나는 것이 없듯, 개미떼의 습격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모래알갱이처럼 해체되는 성과 개미들!! 그리고 그 의미는 유혹하고 미혹하는 성, 또한 무슨 부조리의 화신인 양 그 속에 미로를 감추고 있는 제도적이고 관료화된 성(사회)과 겹친다. 자본주의의 욕망과 유혹(상품미학과 에로티시즘이 결합된)과 제도의 관성이 중첩된, 중의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의미가 이렇듯 다중적인 만큼 그 의미가 드러나 보이는 방식 또한 표면적이기보다는 암시적이다. 말하자면 자본주의와 그 욕망을 상징하는 성은 동시에 카프카의 <성>처럼 제도적(혹은 도식적)이고, 특히 에셔의 드로잉에서처럼 오리무중이다. 이를테면 작가의 그림은 원근법을 적용해 그린 사실적인 그림 같지만, 사실은 교묘하게 왜곡된 그림이다. 해서, 성 자체가 다중적인 차원의 공간들이 (교묘하게, 혹은 무분별하게?) 집합된 것처럼 보이고, 이로써 보면 볼수록 무슨 거대한 미로처럼 보인다. 이런 암시적인 계기들이 어우러져서 자본주의의 욕망을, 나아가 인간일반의 존재론적 욕망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욕망의 덧없음을 상기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이 수상쩍은 성 속으로 들어가 보자. 무슨 줄타기라도 하듯 한 사람이 가녀린 선 위를 지나가고 있다. 그리고 화면이 뒤로 빠지면서 점차 그 선의 정체가 드러나 보인다. 그것은 선이 아니었다. 선들이 모여 거대한 성이 축조되고, 그 사람은 그렇게 이어진 그 성의 가장자리 선을 따라 걷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그는 그 성의 가장자리 선을 따라 걸으면서, 그 성에 속한 공간 속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기를 반복하면서, 그 성의 전모를 가늠하게 만든다. 그는 말하자면 그 성에 대한 일종의 안내자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혹, 그와 나 자신을 동일시해도 무방하다). 이처럼 화면은 시종 그의 동선을 눈으로 뒤쫓게 만드는데, 그러다가 그는 불현듯 화면 밖으로 사라지고 만다. 그리고 무슨 습격처럼 개미들이 그 성을 점령하고, 개미들이 움직이면서 성도 덩달아 움직이고, 개미들이 흩어지면서 성도 덩달아 흩어지고, 종래에는 개미들이 화면 밖으로 사라지면서 성도 흔적도 없이 지워지고 만다. 그리고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던 듯 텅 빈 화면만이 오롯이 남겨진다.
남겨진다? 엄밀하게는 남겨진다기보다는 처음으로 되돌려진 것이다. 박은선의 작업은 언제나 그랬듯 텅 빈 평면에서 시작해서 재차 텅 빈 평면으로 끝난다. 그의 작업에서 처음과 끝, 시점과 종점은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무한대의 표상처럼 하나로 물려있다. 텅 빈 평면 위에 라인 테이프를 부착해 허구적 공간을 축조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재차 그 라인 테이프를 떼어내 처음의 텅 빈 평면으로 되돌려지는 것으로 끝난다. 주로 라인테이프와 때로 거울과 영상으로 지지되는 일련의 작업들은 말하자면 그 시작과 끝과의 사이에 위치해있는 허구적이고 비현실적인 공간, 임시적이고 잠정적인 공간을 보여줄 따름이며, 따라서 이를 통해 드러나 보이는(혹은 드러내 보이고자 하는) 작가의 진정한 작업은 그 시작과 끝에 해당하는 텅 빈 평면이며, 무이며, 부재의 공간이다. 작가의 작업에서의 형상은 말하자면 이 부재의 공간적인 조건을, 무의 존재론적인 조건을 더 잘 드러나 보이게 하고, 더 절실하게 하기 위한 과정이며 부수적인 장치에 지나지 않는다. 마음대로 붙이고 뗄 수 있는 라인테이프나 거울에 비친 반영상, 그리고 영상으로 구현된 일루전은 모두 이 무를, 부재를, 허상을 드러내고 강조하기 위한 장치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렇듯 텅 빈 평면에서 시작해서 재차 텅 빈 평면으로 끝나는 작가의 작업은 종래에는 공수래공수거에 비유되는 삶에 대한 메타포 같다. 이렇게 근작의 주제인 성(자본주의의 물신)은 신기루 같고, 그 성을 기웃거리는 사람은 그 신기루 같은 삶을 쫓는 덧없는 욕망의 화신 같고, 화면 속에서 와글거리다 사라지고 마는 개미들은 그 성만큼이나 실체 없는 욕망에 사로잡힌 우리 모두의 자화상 같다. 개미들의 습격이 자본주의 물신(욕망에 사로잡힌 삶)의 현실적인 토대를 갉아먹고, 분해하고, 해체시켜 초현실적 풍경으로 변질시키고, 그 실체 없음을 증명한 것이다.
작가는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성의 다중성을, 다면성을, 다차원성을 상형한다. 즉 성은 너무 넓어서 다만 한 차원만으로 다 담아낼 수가 없고, 너무 복잡해서 일면적으로만 가시화할 수가 없다. 성은 그 속에 다차원이 공존하는 미로다. 성 속을 거닐 때(혹은 헤맬 때) 나는 이 방(차원)에서 저 방(차원)으로 건너갈 수가 없고, 이 방에 속해져 있을 때 저 방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해할 수도 간섭할 수도 없다. 마치 카프카의 K에게 알 수 없는 이유(기계적인 제도)로 이 방에서 저 방으로 건너가는 것이 금지된(사실상 불가능한) 것처럼, 투명함으로 불투명을 가장하고, 열려있으면서 막혀있는 자본주의 물신의 방 속에, 나는 갇혀있고 단절되어져 있다.
다면과 다차원이 공존하는 의식의 구조를 상형하고 있는(온갖 이질적인 정보들이 중첩된 인터넷의 해부학적 구조를 닮아있는?) 작가의 이 그림은 동시에, 마찬가지로 다면과 다차원이 얽혀있는, 해서 끝내 그 실체에 가 닿을 수가 없는 성의, 욕망의, 신기루의 구조(마치 미로와도 같은)를 닮아있다. 보기에 따라선 성의 세부를(성의 세부로부터 보이는 하늘?), 혹은 성으로 상징되는 의식의, 욕망의 단면을 클로즈업한 것 같다. ■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전시제목성(Castle)
전시기간2010.02.26(금) - 2010.03.16(화)
참여작가
박은선
초대일시2010년 02월 26일 금요일 06:00pm
관람시간11:00am - 07:00pm
마지막 화요일은12시까지
휴관일일요일
장르회화와 조각
관람료무료
장소갤러리 룩스 Gallery Lux (서울 종로구 옥인동 62 )
연락처02-720-8488